가족의 의미 2

가족을 위해 하는 기도의 공덕은 오롯이 가족에게 갈까? 불교에서는 가족을 어떻게 해석할까?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일화를 통해 부부관계나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대해 정립해주었다. 부부는 도반의 관계다. 함께 수행하며 서로의 수행을 독려하는 관계다.
부모자식간에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이 되어주어야 한다. 자식이 선업을 쌓을 수 있게, 악업을 멀리할 수 있게 가르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족은 인생이라는 여관방에서 어쩌다 같이 묵은 것일 뿐, 애착하거나 집착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그네가 아침에 일어나면 이내 흩어지는 것과 같이 미혹하여 얽매여서는 안 된다.

#가족, 공동체, 기도, 수행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의미

지난 초하루 법회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혈연과 식구라는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가족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혈연으로 인연을 맺고 한때 식구로써같이 살았지만 지금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까지 모두 가족이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실제 우리나라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4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데요. 실제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단위를 이루고 살아가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관념적으로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시기야말로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가족에 대한 이야기, 홀로 수행하는 수행자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 속에 새기기를 당부 드렸습니다. 홀로 수행하는 수행자일수록 소유와 애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현대에 혼자 사는 사람에게 대입하여 혼자 사는사람일수록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버려야 되겠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와 함께 부부라는 가족관계에서 만일 한 보살님이 남편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는데 남편은 낚시를 하면서 살생을 하는 악업을 짓는다면 보살님의 공덕이 과연 남편에게 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도 잠깐 언급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이어서 해볼까 합니다. 

기도의 공덕은 기도한 사람에게 있다

가족의 최소 단위는 부부입니다. 그 다음에 자식이 있고, 자식끼리는 형제 자매의 관계가 있습니다. 부부간에, 또는 형제자매간에 공덕을 주고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에 대해 들어보았을 겁니다. 지눌스님에게는 누이가 있었는데 이 누이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큰스님인 오라버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나는 당연히 기도를 할 필요도, 수행할 필요도 없다’고 말입니다.

하루는 누이가 보조국사가 계시는 절에 찾아왔습니다. 마침 점심공양 때였는데요. 보조스님이 누이에게 권하지도 않고 당신 혼자 식사를 하시는 겁니다. 누이가 해도 너무하다고 따지고 묻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한 기도와 수행을 하기 때문에 너는기도와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 대신 밥도 먹어주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따지느냐?”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명료합니다. 기도도 스스로 하는 것이고 선업도 스스로 지어야만 그에 대한 선한 과보가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의 수행이고 그 자체가 선업을 짓는 것이기에 기도를 한 사람한테 선한 과보가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기도의 선업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족을 위해서 아무리 기도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느냐? 그것은 또 아닙니다. 먼저 부처님께서 부부를 어떤 관계로 생각하셨는가를 알아보면 이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선미여인과 수행자 

부처님이 전생에 수행자로 살던 때에 정광부처님이 인근에 오시게 됩니다. 이 수행자가 정광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싶은데수행자라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이때 선미라는 여인이 수행자에게 연꽃 다섯 송이를 주면서 정광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를 돕습니다. 그런데 꽃 공양을 도와주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다음 생에 부부의 연을 맺어달라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수행자가 말합니다. “나는 지금 생도 그렇고 다음 생도, 그 다음 생에도 수행자로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과 부부의연을 맺을수 없습니다.” 그러자 선미 여인이 답합니다. “저는 다음 생과 그 다음 생, 그 다음 오백 생 동안 당신의 수행을 지원하고후원하고 격려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행자는 그렇게 선미 여인과 약속을 하고 정광부처님에게 꽃 공양을 올립니다. 두 사람은 오백 생 뒤에 고타마 싯다르타와 그의 아내인 야쇼다라 공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부부의 연을 맺은 후에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는 것이지요. 

부부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까요? 이 이야기에 의하면 부부는 도반의 관계입니다. 도반이라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끼리서로 힘이 되고 격려하는 사이를 말합니다.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부간의 애정은 일반 연인들간의 연애감정하고는 다릅니다.부부애는 일종의 동지애입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지원하고 격려하고 힘이 되는. 그렇게 함께 가는 것이 동지입니다. 

부부는 도반이다 

부부는 가족이라는 배를 함께 이끌어 나가는 관계입니다. 거센 바다 위에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동지이자 도반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출가를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 만큼 서로의 수행을 도와주는 도반의 관계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때문에 내가 기도를 하는 것은 첫 번째,  나의 수행을 위해서고 두 번째, 나의 배우자가 열심히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일입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가족을 위한 기도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애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 같은 애정은 3년이 지나면 슬그머니 사라져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생기는 것이 정입니다. 정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함께하는, 가족을이끌고 공동의 목표와 지향하는 바를 함께 이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나아가는 지향성입니다. 그냥 정만 가지고는 언제 찢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불제자라면 부부는 도반의 관계로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요? 부처님 당시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 늦게 결혼을 해서 환갑이 되어서야 늦둥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귀한 자식인데 7살이 되던 해에 운명을 달리합니다. 다 늙어서 힘들게 자식을 봤는데 제일귀여울 때 죽은 거예요. 너무나 슬퍼하던 이 양반이 저승에 자식을 구하러 갑니다. 

염라대왕을 만나 사연을 이야기하자 염라대왕이 자식이 있는 곳을 알려줍니다. 너무나 반가워하며 같이 돌아가자고 손을 덥썩 잡으니까 아이가 놀라서 “당신 누구시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로 있고 저 세상에 잠깐 당신 아들의 몸을 빌려 살다가 돌아왔는데 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느냐고 말입니다. 늙은 아버지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아, 내가 자식이라고 하는 것도한때의 인연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이 일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부모와 처자식의 인연으로 모여 사는 것은 마치 여관의 나그네가 아침에 일어나면이내 흩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거늘 어리석고 미혹하여 얽매어 집착하고 있는가.”

가족이라 하는 것이 사실은 인생이라는 여관에서 잠시 한방에 투숙해 있는 사람이며, 다음날이 되면 서로 다른 길로 간다 이겁니다. 지금 생이라는 이 여관 방에 같이 묵은 것 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애착하고 집착하니 참으로 불쌍한 중생들이라고 부처님이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는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한다. 자기 자신조차도 제 것이 아닌데 어찌 아들과 재산을 제것이라 여기는가.” 내것이라는 집착과 소유욕이 바로 중생들의 어리석음입니다. 부모나 자식이나 자기 인생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죠. 부처님 말대로 하면 절에 와서 기도할 필요도 없고 자식들 지원해줄 필요도 없고 각자 살면 됩니다. 근데현실은 그게 아니에요. 그래서 경전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 당연히 부처님 당시에도 의문을 가진 재가자들이 있었겠죠. 이것을 부처님에게 묻자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어야 할 다섯 가지 의무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첫 번째는 자식을 사악함으로부터 지켜줘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선에 들게 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시율을 가르쳐주고, 네 번째는알맞은 때에 짝을 찾아주고, 다섯 번째는 적당한 때에 재산을 물려줘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가 부모의 의무라고 부처님이 직접이야기했습니다. 

악업을 행하지 말고 선업을 행하게 하라.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부처님의가르침 대로 살 수 있도록 자식을 챙기는 것이 부모의 제일 큰 의무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식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기술과 가정을 이어주고, 아무것도 없는 빈손에서 시작하면 힘드니까 자기가 가지고있는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정신적인 스승이어야 합니다. 마치 부처님이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선업을 행하고악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치고, 수행하고, 수행을 점검하듯이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이 되어서 자식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독려해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선업을 주려고 해도 자식이 그것을 받을 그릇이 되지 않으면 선업의 과보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진정 자식을 위하는 길은 자식이 선한 과보를 담을 수 있는그릇으로 만드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의 스승입니다. 

선업을 권하고 악업을 말리는 일 

경전에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찬달라라는 망나니가 있었습니다. 망나니는 죄인의 목을 베는 것이 자기 일인데, 이 망나니가 왕에게 가서 “죄인의 목을 벨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부처님의 제자로 살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살생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분노한 왕은 찬달라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인도는 카스트제도이지 않습니까? 형이 죽자 망나니라는 직업이 동생에게 세습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똑같이 살생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동생의 동생, 그 동생… 네 명의 목을 베고 마지막으로 막내 한 사람이 남았는데 막내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 막내의 목을 베려는 순간 이 형제들의 어머니가 나타나 간청합니다. 제발 이 아이만은 베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앞에 네 명의 자식들이 죽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닥 막내가 죽을 때가 되니 나타나 목을 베지 말아달라고 하니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막내만은 살리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머니의 설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명의 형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배우고 그 가르침 대로 살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을 했기에 죽음의 순간에 나쁜 생각이나 삶에대한 애착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 막내아이는 아직 공부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 삶에 대한 애착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고, 그런 나쁜 생각이 아이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 염려됩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죽이면 안됩니다.”

내 자식이 잘 먹고 잘 살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게 부모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자식이 나쁜 생각을하지않을까 염려해야 합니다. 내 자식이 악업을 짓지는 않은가, 선업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런 것을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함께 수행하고 지혜를 닦는 관계 

불교의 관점에서 가족이라는 것은 도반으로써 스승으로써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관계가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계속이어졌으면 좋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께 누군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우리 부부는 금슬이 참 좋아서 다음 생에도 부부의 연을 맺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래의 네 가지를 지키면 다음 생에도 부부의 연을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믿음이 같아야 한다. 둘째, 함께 계를 지켜야 한다. 셋째, 함께 보시를 해야 한다. 넷째, 함께 지헤를 닦아야 한다.

계를 지키고 지혜를 닦고 보시를 하고 팔정도를 함께 수행하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지혜를 닦고계를 지키는 삶을 살면 다음 생에도 같은 연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부모자식간에도 적용됩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가족은 현실적으로 가장 가까운 타인이며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가족들이 서로 도반의 관계, 스승의 관계가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열심히 수행한다면 그 연이 다음 생과 그 다음 생에도 이어질것입니다. 

다들 사는 게 바쁘니 나라도 절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만이 우리 가족을 위하는 길일까요? 물론 안 하는 것보다 백배 낫겠지만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 가족들이 모두 부처님 법을 따르는 도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들이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바라보는 가족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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