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6

참선의 네 번째 방법은 ‘조고화두와 반문문자성’이다. 참선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돌이켜서 자성을 듣는 것이며, 화두를 환하게 비추어서 살피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것은 순류이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이 끌려다니고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역류다. 순류의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물인 망상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다.
참선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부차적으로 생사심과 장원심이 있어야 한다. 생사심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이 생에 수행해야 한다는 간절함이고, 장원심은 잘되는 못되든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이다.
초심자는 습과 아만으로 인해 공부가 어려우나, 단지 놓아버리고 일념만을 들 수 있으며, 구참자는 백척간두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으나 해온대로 면밀하게 공부할 수 있는 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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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서 ‘참선의 방법’ 챕터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 마음과 생각은 다르다, 마음과 망상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광대한 불성의 바다에서 망상이 뛰어노는 것입니다. 망상은 조건에 따라서 생기고 사라집니다. 조건생 조건멸하는 것이 망상입니다. 망상은 내가 의도하는 대로 생겼다가 의도한 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망상은 단지 조건에 따라 움직입니다.

조건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출발입니다. 화두는 생각의 머리, 즉 생각이 일어나기 전입니다. 생각은 망상이니 생각이 일어나기 전은 광대한 자성의 바다입니다. 연기실상이고 불성이고 부처님의 지혜와 덕성입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곧바로 가리켜 마음을 본다고 할 때 마은 바로 화두요 불성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참선의 방법인 ‘조고화두와 반문문지성’ 다섯 번째 방법인 ‘생사심과 장원심’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에 앞서 지난시간에 말했던 의정, 의념, 참 의심, 공안과 같은 표현들이 어떻게 다른가를 짚어보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화두, 공안, 의념… 개념 정리

먼저 화두는 깨치고자 하는 바, 이 세상이 실제 존재하는 모습, 나와 남이 아닌 무엇, 자성, 본래 성품, 연기실상과 같은 말입니다. 화두로 가기 위해서는 망상을 제거해야 하는데, 망상을 제거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가 하나의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서 다른 생각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이 공안을 들고 화두를 보는 것입니다. 간화선입니다. 다른 만 가지 생각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되는 하나의 생각이 바로 공안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개는 불성이 없다’ ‘뜰앞의 잣나무’ 이런 것들이 공안입니다. 국가에서 고지한 문서와 같이 아주 강한 신뢰를 가진 것이라고 해서 공안이라고 합니다. 스승이 내린 공안을 믿기 위해서는 스승이 내린 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스승님이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는 말을 믿어야 하는데 경전에는 ‘불성은 어디에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시작됩니다. 이 의문이 다른 생각을 다 없애기 때문에 망상을 제거하는 하나의 도구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의심이 의념이 됩니다. 참 의심은 이러한 의념이 이어지다가 끊어지다가 하는 와중에 어느 경지에 들어가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의심이 끊기지 않고 모든 망상이 제거된 상태를 유지할 때 비로소 참 의심이 자리잡은 상태라고 말하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성을 볼 수 있습니다.

화두와 공안을 일반적으로 혼용해서 쓰지만 각각의 용어를 명황하게 구분하는 것이 앞으로 공부할 것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조고화두와 반문문자성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은 문자성을 반문한다는 것입니다. 듣는 자성을 돌이켜서 듣는다는 뜻이지요. 문자성은 결국 자성입니다. 자성을 돌이켜서 듣습니다. 보통 우리가 들을 때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데, 그것이 아니고 안으로 돌이켜서 자성을 듣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성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만 있다면 내 안과 내 밖이 구분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고 모든 것이 연기실상의 세계에 있는 것이 자성이고 불성인데, 그것이 내 안에만 있다고 하면 중생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짓된 나를 말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반(反)자를 쓴 것은 단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조건에 반응하는 문(聞)이 아니고 화두를 본다는 것과 같습니다. 조고화두照顧話頭도 같습니다. 화두를 비추어서 살핀다는 것입니다. 조고화두와 반문문자성은 같은 말입니다.

만일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다면 이는 소리와 형상을 따라 쫓아가며 사물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이어서 순류順流라고 부릅니다. 만약 오롯하고 또렷한 한 생각이 ‘불생불멸’ 가운데서 소리와 형상을 따라 쫓아가지 않으면 이를 역류逆流라 하며, 화두를 비추어 살핀다고도 하고,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순류는 일상이고 역류는 수행

역류는 조고화두고 반문문자성입니다. 순류는 사물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것은 순류입니다. 무언가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것에 끌려다니고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리와 형상을 따라 쫓아가며 부림을 당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서 조건에 따르지 않고 자성과 본래성품을 비추어 보거나 듣는 것은 역류라고 하여 두 가지를 구별합니다. 우리가 아는 공부는 순류가 아니라 역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망상은 조건생 조건멸입니다. 조건에 따라 생기고 조건이 변하면 없어집니다. 조건의 대표적인 것이 형체, 냄새, 맛, 이전의 기억 같은 것입니다. 결국 망상은 순류를 통해 생겨나고 깨달음은 역류의 과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역류의 과정을 통해 성취하는 깨달음은 순류의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물인 망상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여기까지는 전 시간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화두참선을 어떻게 하는가의 핵심 내용입니다. 참선의 방법은 지난 시간과 이 지점까지가 핵심입니다.

5. 생사심과 장원심

이 부분부터는 참선의 방법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입니다.

생사심生死心이 간절하지 않으면 의정이 일어나지 않고, 공부가 향상되지 않습니다. 장원심長遠心이 없으면 마치 하루 볕을 쬐고 열흘 추운 것과 같아서 공부가 무르익지 않습니다. 장원하고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는데, 진정한 의심이 일어날 때는 세간적 번뇌를 쉬지 않아도 저절로 쉬어지며, 시절이 한번 이르면 자연히 조건이 성숙되어 결과가 나타납니다.

순류를 따르는 것은 망상이고 역류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순류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망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편은 의심, 의정을 드는 것입니다. 그 의심이 일어나게 하려면 생사심과 장원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앞 부분까지 참선공부의 핵심적인 내용을 알아보았다면 지금부터는 ‘이렇게 참선공부를 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알아봅니다. 여기에서는 생사심과 장원심을 들고 있습니다. 생사심이 없으면 공부가 향상되지 않고 장원심이 없으면 공부가 무르익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꾸준함으로 성취하는 수행

생사심은 생사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이 몸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것은 이번 생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몸은 오직 한 번이며 이 삶은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바로 생사심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소중합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표현이고 생사심은 불교의 윤회에 바탕한 표현입니다.

장원심은 하나를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잠깐 했는데 잘 되어서 풀어진다던가 조금 했는데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되든 못되든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들기 위해서는 간절한 마음과 꾸준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간절함, 그리고 꾸준함은 우리의 일상과 매치가 잘 되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꾸준함은 비일상적인 단어입니다. 자신의 일상을 어느 정도 다스리고 자신의 일상을 깨뜨리고자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심심하면 조금 해보고, 호기심에 조금 해보는 식으로는 공부가 안 됩니다. 생사심과 장원심을 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수행에 들어갑니다.

6. 공부의 두 가지 어려움과 쉬움

여기에서는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그리고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심자의 보편적인 병통은 망상과 습기習氣가 놓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망상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초심자의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왜냐하면 망상을 비우는 것은 순류 즉 자연스러운 방식, 노력하지 않는 방식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망상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면 화두를 보는 참선공부에 들어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심자는 첫 단추 끼우는 것이 힘들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습기라는 말은 순류와도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순류이고, 몸에 익은 습관과 행동대로 살아가는 것이 습기입니다. 절집 말에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설은 것은 익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익은 것은 무명의 지배를 당하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그것이 일상적인 우리의 삶입니다. 이렇게 익은 것을 낯설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순류를 역류로 바꾸는 것이지요.

초보자의 어려움: 습과 아만

초심자는 망상을 없애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첫 단추 끼우는 것이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어서 초심자가 어려워하는 상황들이 나열됩니다.

부잣집 자제 출신은 습기를 버리지 못해 약간의 모욕도 참지 못하며,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는 부잣집 자제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예전의 기준으로 따지면 요즘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잣집 자제와 다름이 없습니다. 요즘은 굶어죽는 사람을 보기가 힘듭니다. 전화만 하면 먹을 것을 집으로 가져다줍니다. 옛날 같으면 양반도 경험하기 힘든 일입니다.

약간의 습기,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것에 끌려다니며 망상을 일으키는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공부는 시작도 못 합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게 되지요.

옛사람의 연구를 가지고 이해했다는 소견을 일으켜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큰 아만을 일으킵니다.

공부는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인데 지식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해서 하나의 지식을 더하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기존의 습기, 성격, 체질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지식만 조금 더 늘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단순히 지식만 안다고 해서 자성을 깨칠 수는 없습니다. 이것 역시 초심자들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어떤 이들은 망상을 겁내는데, 없애고 없애도 망상이 그치지 않아 종일 번뇌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업장이 두터움을 원망하고, 이로 인해 도심이 퇴실하기도 합니다. (……) 망상과 사생결단을 내고 싶어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피를 토하고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또 어떤 이들은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나, 이미 자신들이 ‘귀신’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기분이 좋으면 웃고 기분이 나쁘면 화를 내고 배가 고프면 울면서 있는 그대로 자기감정을 표현합니다. 불교의 간화선에 관심이 없고 이해나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망상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도 않고 망상과 사생결단을 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깨닫고 싶다는 생각이 없으므로 망상에 대한 자기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망상이라는 귀신을 만들어서 싸우려들거나 겁내거나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가 허깨비를 만들어놓고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깨달음에 대한 욕심입니다. 욕심이 있으니까 그것에 대한 부산물로 망상이라는 귀신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욕심이 자기 공부를 스스로 방해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욕심 없이 그냥 하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는, 그냥, 꾸준히 해야 합니다. 허운스님은 진정한 공부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생사심과 장원심을 말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욕심이 화두를 드는 조건이라면 오히려 망상을 귀신으로 만들게 됩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 환희마歡喜魔가 벌써 마음에 들러붙은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 일찌감치 동정動靜 두 마왕魔王의 권속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환희마는 조금 잘 되는 것에 이미 취해버리는 것입니다. 선정에 금방 들어가고 마음이 고요하면서도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망상을 일으키려고 해도 일어나지 않고 한 생각만 또렷하고 기분도 편안하고 좋다, 이런 것이 환희마입니다. 그래서 장원심이 중요합니다. 공부가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받아들이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요한 곳에 있으면 공부가 잘 되는데 걷거나 밥 먹거나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때는 공부가 안 된다, 그래서 좌선에만 들려고 한다는 것은 동정 두 마왕의 권속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늘 일어납니다. 늘 일어나는 그 시끄러운 일상 안에서 공부가 이뤄집니다. 생각거리, 망상거리가 주위에 무지하게 널린 일상생활에서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가 되어야 그것이 진짜 공부이지, 조용하게 망상이 일어나지 않을 조건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만 공부하는 것으로는 망상을 제거하는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초보자의 쉬움 – 놓아버리고 일념만을 들 것

비록 공부가 어렵다고는 하나, 길만 찾아내면 또한 쉬운 것입니다. 어떤 것이 초심자의 쉬움입니까? 달리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놓아버립니까? 일체의 무명번뇌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 만약 이 몸뚱이가 한 구의 시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나’라고 보지도 않을 것인데, 무엇을 놓아버리지 못하겠습니까?

공안 중에 ‘걸어다니는 이 시체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공안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시체와 다를 바 없는데, 어떻게 해서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육신이 걸어 다니고 먹고 자고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하는가? 하고 의심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의심을 일으킬 때는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상식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어떻게 먹고 말하고 듣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이 육신이 시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시체와 같기 때문에 아상과 욕심을 놓아버리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만일 망상을 두려워한다면 다시 망상을 한 겹 더하는 것입니다. 청정하다고 느끼면 이미 청정한 것이 아니고, 공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면 이미 유有 가운데 떨어진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 반드시 깨닫고 싶다는 생각은 망상 중에서도 아주 큰 망상이고 심각한 병입니다. 이런 병에 빠지면 망상을 두려워해서 망상에 망상을 한 겹 더 올리는 꼴입니다. 또한 공부가 잘 되는 것 같고, 청정하다고 느낀다면 청정함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공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망상을 버리고 생사심과 장원심만을 갖추면 됩니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생사심과 장원심을 굳건하게 챙기면 진정한 의심이 들고, 진정한 의심이 들면 화두를 볼 수 있습니다. 깨닫는 것은 그럴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지, 깨닫겠다는 욕심에 묶여있다면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이렇게 생사심과 장원심을 항상 지키고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자기 마음을 잘 살펴서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과도한 욕망이 얼마나 커지는지, 존재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참자의 어려움 – 백척간두에서 나아가지 못함

구참자는 망상을 제거하는 데까지는 갔는데 참선의 진짜 목적인 자성을 보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데에서 그쳐 더 나아가지 않고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백척간두에서 나아가지 못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와호장룡> 같은 영화에서 보면 무림의 고수들이 높은 대나무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그 위에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높은 대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해야 합니다. 은산철벽을 관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망상을 제거하는 것은 조건이지 참선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두를 보지 않으면) 마른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 같이 앉아만 있는 것을 제일로 칩니다.

망상을 제거하면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생태에서 계속 있는 것입니다. 적적하고도 성성해야 하는데 적적하기만 하고 성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역시도 우리 같은 초심자들은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

구참차의 쉬움 – 면밀하게 공부할 것

구참자는 지금까지 해온 공부를 지금까지 해온 대로 계속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쉽습니까?

시절인연이 한번 도래하면 통桶의 밑바닥이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면밀하고 세세하게 밀고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치 물통의 밑바닥이 쏙 빠지듯이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챕터는 한산대사의 게송으로 마무리됩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사방을 돌아봐도 끝이 없구나.

고요히 앉았으니 아무도 모르고

외로운 달만 찬 샘에 비치네.

샘 가운데는 달도 없으니

달은 푸른 하늘 가운데 있네.

이 노래 한 곡 불러 보지만

노래 속에 있는 것은 선이 아니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분들의 게송이기 때문에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저는 이 게송의 깊은 뜻을 알지는 못하고, 단지 머리로 이해한 바를 설명하는 것 이상 할 수 없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섰다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망상이나 번뇌가 사라진 탁 트인 세상이더라는 것이죠. 그 깨달음의 세계에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이어서 깨달음의 경지가 어떠한가를 설명하는데요. 달과 샘 푸른 하늘을 놓고 자신의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늘에 있는 것이 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샘에 비친 달만 달이라고 생각하고 푸른 하늘이 있는 줄도, 하늘 가운데 달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중생들이 보는 세계는 샘 가운데 있는 달 같은 것입니다. 말로 할 수 있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화두가 아니라 화미로 얻을 수 있는 세계는 마치 샘 가운데 비친 달과 같고, 화두는 푸른 하늘에 환하게 떠있는 달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의 경지를 말로 표현하지만, 말에 빠져서 얽매이거나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로 마무리합니다.

조사스님들의 게송을 처음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여러 번 접하다보면 어떤 패턴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패턴을 알게 되면 어느 정도 논리적인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깨달아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이해되는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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