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참선요지

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5

전 시간에는 공부에 입문함에 있어서 도를 깨치는 선결조건을 알아보았습니다. 공부하기에 앞서서 무엇을 먼저 정비해야 하는가, 사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면, 이번 시간에는 실제로 참선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가를 공부하게 됩니다.

38쪽부터 나오는 ‘참선방법’ 챕터는 참선 방법은 여섯 가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좌선을 할 때 알아야 할 것’은 테크닉입니다. 2. ‘공부에 착수하는 법: 손님과 주인을 의식함’은 참선의 선결요건인 망상을 제거하는 것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3. ‘화두와 의정’은 참선의 목적인 성품을 보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4. ‘조고화두와 반문문자성’ 5. ‘생사심과 장원심’ 6. ‘공부의 두 가지 어려움과 쉬움’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오늘 이야기도 역시 책의 첫 번째 문장을 부연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첫 번째 문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할 때 오늘 배우는 내용이 허운스님이 말씀하신 것 중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세한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고서 지금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1. 좌선할 때 알아야 할 것 (38p)

우리의 일상 활동이 모두 도道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어딘들 도량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일상생활이 곧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수행하는 날이 따로 있고 수행하지 않는 날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이 다 수행하는 시간이고 내가 있는 장소가 다 수행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참선하고 좌선하는 시간을 따로 내는 이유는

소위 선당이니 좌선이니 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장애가 깊고 지혜가 얕은 말세의 중생들을 위해서 베풀어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선당은 선방을 말합니다. 원래대로 하면 일상생활 그 자체가 수행인데 우리는 아직 수행을 제대로 해본 경험도 없고, 수행의 힘도 약하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때 얻은 힘으로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해나갈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수행이나 마음공부에 대해 관심이 없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 내지는 하루에 한 번만 집중수행하면 된다’ 혹은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하고 가족들을 돌보고 일상생활을 하다가 수행하는 시간에만 수행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당분간 필요하기 때문에 좌선하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굳이 좌선 시간이나 장소를 정해놓고 할 필요가 없고, 일상생활 자체가 수행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좌선을 할 때 알아야 할 것은 39쪽 첫 번째 줄에 나옵니다.

좌선은 비정상적 특수한 상황, 심신을 잘 조절해야

좌선을 할 때는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잘 조절하지 못하면 작게는 병이 나고 크게는 마魔가 붙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한두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는 일은 아주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비정상적이므로 좌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이 특수한 상황에서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병들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을 하는데 정작 수행을 하다가 심신이 피폐해질 수 있으므로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잘못해서 상기(上氣)가 되면 책도 못 보고 생각도 못 합니다. 심할 때는 머리로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정신분열 증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좌선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만큼 인간들에게는 비정상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좌선을 할 때 몸은 어떻게 조절하고 마음은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가를 알아봅시다.

몸은 자연스럽고 올바르게 세울 것

가부좌를 할 때는 자연스럽고 바르게 앉아야 하며,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火 기운이 위로 올라가, 나중에 눈곱이 많이 끼고 입 냄새가 나며, 숨이 답답해지고 입맛이 없어집니다. 심할 경우 피를 토하기도 합니다. 또한 허리를 구부리거나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혼침에 떨어집니다.

가부좌라는 비정상적인 행위를 할 때 내 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자세가 올바르지 못하면 마음이 들뜨거나 혼침에 빠지거나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혼침에 빠진다는 것은 정신이 혼미해진다, 쉽게 말하면 꾸벅꾸벅 조는 것이 됩니다. 자세를 올바로 하되 억지로 올바로 하면 안 되고 자연스럽게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올바르게 하는 것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계속 해보면서 자신에게 편안한 자세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그날의 몸 컨디션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너무 꼿꼿해도 안 되고 너무 구부정해서 혼침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볼 때 자세에서 중요한 것은 허리입니다. 허리만 똑바로 펼치면 가슴, 목, 어깨는 자연스럽게 바로 섭니다. 처음 좌선을 할 때 10분 정도 좌선을 한다면 그렇게 불편한 점을 느끼지 못하지만, 선방에서 세 달 동안 10시간 씩 앉아있으면 위에서부터 고통이 밀려 내려옵니다.

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다리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아픕니다. 왜 아픈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루에 10시간 동안 앉아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공부를 해야겠다, 좌선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 때문에 앉아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몸은 시간과의 싸움인데,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은 초조하고 급박하지 않을 것

공부를 너무 급박하게 해서 마음이 어지럽고 초조하다고 느끼면 일체를 놓고 공부도 놓아 버리십시오. (……) 그렇지 않으면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누적되어 성격이 조급해지고 화를 잘 내게 되며, 심할 경우에는 미치거나 마가 붙게 됩니다.

나이를 먹어서 시작했다거나 빠른 성취를 원해서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느슨하게 해도 앉아서 졸기 때문에 공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게을러도 안 됩니다.

수행이 너무 급해서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강제할 경우, 내 자신이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면 현실을 부정하게 됩니다. 현실을 부정한다는 말은 나만의 세계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자들은 어떻습니까? 환청이 들리고 환시가 보입니다. 참선도 하다보면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입니다.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환청이나 환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만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흔히 나타나고는 합니다. 저 같은 경우 한 철 내내 특정한 노래가 들리기도 했고요. 어떤 경우에는 내 앞에서 어떤 사람이 벽을 타고 올라가기도 합니다. 헛것이지요.

일반적인 경우에는 미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좌선을 할 때는 흔하게 생기는 일입니다. 그럴 때는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혹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냥 생기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신경을 안 쓰면 됩니다. 그런데 ‘공부가 되고 있다는 표시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런 현상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것이 더 진짜 같게 느껴집니다.

노래가 들리거나 사람이 보이는 정도면 양호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와서 머리에 손을 올리고 ‘너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고 수기를 준다거나, 부처님을 모시는 동자들이 나와서 꽃가루를 뿌리는 등 상서로운 환각이 보인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나보다, 깨쳤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환청이고 헛것일 뿐입니다.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입니다.

‘환각이 보이면 안되는데 왜 저런 것이 보일까?’ 하고 자신을 책망하거나 ‘내가 깨쳤다보다!’라고 생각하고 그 현상에 매달리게 되면 미치거나 마가 붙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자연스럽고도 올바른 자세를 취해야 하고, 정신적으로는 좌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비정상적인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여기까지는 워밍업입니다. 두 번째는 참선의 선결조건인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참선의 선결조선이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오늘 공부하는 내용은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2. 공부에 착수하는 법: 손님과 주인을 인식함

불교에서는 수행을 공부라고 표현합니다. 공부라는 말이 일반적으로는 지식 습득을 의미하지만 불교에서는 수행입니다.

손님과 주인을 인식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이 부분, 이 내용을 몇 십 번은 들여다보았지만 이 내용을 정확하게 직관적으로 이해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망상을 제거하는 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손님과 주인을 인식한다는 말을 쉬운 말로 하면 ‘마음과 생각은 별개다.’입니다. 이 명제를 머릿속에 그대로 입력해야 합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망상입니다. 마음은 이 책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자성이고 여래의 지혜와 덕상, 내지는 연기실상, 혹은 공이라는 개념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망상은 조건생 조건멸

생각은 조건이 있으면 생겼다가 조건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집니다.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또한 생각은 찰나생 찰나멸입니다. 찰나란 현대적인 시간개념으로 이야기하면 1/75초입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는 짧은 순간에 하나의 생각이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왜 생기느냐? 생길만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생깁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는데 내 앞으로 새로 나온 자동차가 지나가서 그것을 보고 ‘멋있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이때 내 눈에 자동차가 보이지 않아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죠. 그 차가 지나갔다는 조건이 있으니까 조건에 따라서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차가 사라지고 나면 그 생각도 사라집니다.

이런 일은 실은 찰나가 아니라 3~4초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약 내가 ‘멋있다’는 생각을 1초 동안 했다면 사실은 이 생각이 1초에 75번 동안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한 것입니다. 3~4초라면 300~400번 같은 생각을 반복해서 한 셈이지요.

마음은 생각(망상)은 다르다

마음과 생각은 다르다. 이 명제를 꼭 명심해야 하고요. 생각은 찰나생 찰나멸이라는 것을 무조건 외워야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스스로 고민해야 합니다.

생각이 망상이라고 칩시다. 조건이 있으면 생겼다가 조건이 사라지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입니다. 마음은 자성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자성이라는 표현 자체에 함정이 있습니다.

자성, 성품 등의 표현을 쓰면 마치 생각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의식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나의 본래 성품은 나라는 틀에 갇혀있는 무엇이 아니라 나다 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라는 구분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에서 조건이 갖춰지면 생각이 툭 튀어 오르고 사라집니다. 생각과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망상은 손님이고 마음은 주인이다

손님과 티끌은 망상에 비유되고, 주인과 허공은 자성에 비유됩니다. 상주하는 주인은 손님을 따라 오거나 가지 않습니다. 이는 상주하는 자성이 본래 망상을 따라서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 티끌은 스스로 흔들리지만 본래 맑고 고요한 허공을 장애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망상이 스스로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것일 뿐, 본래 여여부동한 자성을 장애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주인 입장에서 손님은 왔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망상은 손님과 같습니다. 그런데 자성은 연기실상, 연래의 지혜, 본래성품은 조건에 따라 있다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지요.

티끌이 움직인다고 해서 허공이 영향아 움직이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허공은 티끌이 아무리 움직이더라도 고요합니다. 다만 망상만 조건에 따라서 생겼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명제는 이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은 다르다.’

손님이라는 것은 비교적 거칠고 티끌은 미세합니다.

손님은 거친 번뇌, 티끌은 미세한 번뇌입니다. 거친 번뇌는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 짜증난다, 괴롭다, 즐겁다, 슬프다 등입니다. 미세번뇌는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수행을 해서 마음을 살펴봐야만 겨우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보통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내가 있다는 느낌은 아주 뿌리 깊은 번뇌이지요.

생각은 조건에 따라서 생기고 멸한다

마음과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왜 중요할까요? 예를 들어 생활을 하다가 화가 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화를 낸 것을 인식하고 화를 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라는 것은 마음이 의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마음이 의도해서 화라는 망상이 생기는 것이라면 마음이 의도하지 않으면 화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화를 내지 말아야지.’라고 의도하면 화가 안 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안 내야겠다고 생각하면 화가 더 납니다. 참다 참다 엉뚱한 데로 튀어버립니다.

생각은 조건에 따라서 생깁니다. 화를 일으키는 조건이 갖춰지면 화가 생깁니다. 화를 일으키는 조건이 사라지면 화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화를 일으키는 조건이 생겨서 한 찰나, 75분의 1초 사이에 화가 일어났다면 이 찰나의 화는 다음 순간의 조건이 됩니다. 화가 났다는 것이 조건이 되어서 다음 찰나에는 더 큰 화가 납니다. 직전 찰나의 생각이 조건이 되어서 그 다음 찰나에 영향을 미쳐 또 다른 망상을 일으킵니다. 화가 이어지는 것이지요.

화가 이어진다는 것이 5분, 10분, 1시간 동안 이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화를 내는 찰나 자체가 조건이 되어 다음 찰나로 이어진다는 것에 방점이 있습니다. 내가 화를 내는 조건을 계속 만들기 때문에 화가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화를 내지 않으려면 ‘화를 내지 않겠다’고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는 조건을 없애면 됩니다. 이것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상당히 중요한 지혜입니다.

다른 표현을 쓰면,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마음은 생각, 망상이고 뒤에 말한 마음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자성, 본래 성품입니다. 내 생각은 내 자성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생겼다 조건 따라 사라집니다. 조건을 바꾸면 됩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 ‘참아야지’ 생각하는 것보다 천수경을 외운다거나 다른 곳에 마음을 쏟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정리하지면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생겼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한 찰나에 하나의 망상이 생기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찰나라는 단어에서 굳이 75분의 1초라는 현대적인 개념을 고집할 것은 아닙니다. 찰나라는 것은 생각 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동안입니다. 이것을 깊이 명심하면 망상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핵심은 망상과 마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3. 화두와 의정疑情

옛날의 조사들은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直指人心 見性成佛 했습니다.

성품을 보는 것은 참선의 목적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품은 자성, 연기실상, 공, 여래의 지혜와 덕성입니다. 이것을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보게 한다고 합니다. 달마대사 같은 분들은 마음이 괴롭다고 하는 사람에게 “괴로운 네 마음을 가져와보아라.” 하고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자성을 바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후대에 가면서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근기가 하열해지는 등등의 이유로 곧바로 마음을 보지 못하니까 각자 수완을 발휘하여 학인들에게 화두를 보게 했습니다. 각자 수완을 발휘하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화두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화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화두는 많은데 (……) 무엇을 화두라고 합니가? ‘화話’는 말이요, ‘두頭’는 말 이전입니다. 이른바 화두란 것은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며, 한 생각이라도 일어났다 하면 화미가 됩니다. 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불생不生’이라고 합니다.

생각은 앞에서 말했듯 마음이 아니라 망상입니다. 하나의 망상의 머리, 망상이 시작되기 직전은 어디입니까? 자성이라는 고요한 바다에서 조건이 일어나면 망상이 튀어 오르는데, 결국 망상이 시작되기 이전은 자성이고 마음이고 연기실상이고 여래의 지혜입니다. 화두를 보려면 도구로써 의정, 의심을 써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이 마음이고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불생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생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멸하려면 그 조건이 변해야 합니다. 자성은 조건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불생하고 불멸합니다. 달리 말하면 불구부정, 부증불감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이죠. 반야심경에서는 자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성을 보는 것이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생각이 곧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망상은 조건 따라 생기고 사라집니다. 자연히 망상 이전인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하기도 하고 이심전심하기도 합니다.

‘이뭣꼬…’ 가벼운 의심을 미세하게 이어나갈 것

자성을 보려면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다양한 자성을 보는 각종 수완, 각종 도구, 방법 중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화두를 보려면 먼저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화두를 보는 지팡이입니다. 어떤 것을 의정이라고 합니까? 예컨대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할 때,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염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입으로 염하는 것입니까? 마음으로 염하는 것입니까? 만약 입으로 염한다면, 잠들었을 때 입은 그대로 있는데 왜 염할 줄 모릅니까? 만약 마음으로 염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누구인가?”에서 가볍게 의심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거칠게 일으키면 안 되고,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좋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의심만 가지는 것입니다. ‘누구인가?’라는 표현에는 이미 사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는데 이미 막연한 전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실은 ‘누구인가?’보다는 ‘무엇인가?’라는 의심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어떻게 의심하는 것이 거칠게 의심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미세하게 의심하는 것일까요? 다음 다음 줄에 나옵니다.

두 번째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거친 의심은 두 번째 생각입니다. 한 찰나에 ‘무엇이지?’ 생각했으면 이 생각이 조건이 되어서 그 다음 찰나에 또 의심을 일으킵니다. ‘입이 그러는 걸까? 마음이 그러는 걸까?’ 이렇게 두 번째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도대체 뭐지?’ 하는 의심만 일으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나이 50이 다 되어서 동창회를 나갔다고 합시다. 친구들과 반갑게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굴 생김새, 키, 피부, 걸음걸이, 말투는 다 생각이 나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나올 듯 말 듯 나오지 않고 답답합니다. 이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고 이 의심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친구 얼굴이 어땠더라? 키가 얼마였더라? 이렇게 두 번째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처음의 ‘그 애 이름이 뭐였지?’ 하고 처음의 의심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미세한 의심을 해야 할까요? 의심이 강하면(거칠면) 다른 생각을 못합니다. 즉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참선의 선결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효과적인 방법 하나가 한 생각을 미세하게 이어가는데, 그것이 조건 따라 두 번, 세 번, 네 번째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늘게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좋습니다. 다른 생각을 못하게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정입니다.

초심자가 일으키는 의념은 아주 거칠어서, 문득 끊어졌다가 문득 이어지고 금방 익은 듯하다가 금방 설어지니 의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고작 생각이라고나 하겠지요.

의심하다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다시 의심하는 것은 의심이라고 볼 수 없고 차라리 망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하고 이어가다보면,

외부세계 인식 않을 때 참 공부 시작

자기가 어디 앉아있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몸과 마음,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이 말은 외부세계를 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외부세계는 망상이 일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조건입니다. 내 눈앞에 뭔가가 보이니까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어떤 소리가 들리니까 거기에 따른 내 안에 어떤 생각, 망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가벼운 의심이 이어지면 외부 세계에 대한 의식이 차단됩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깊이 골몰하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는 상태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를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 의심이 현전해야 비로소 참으로 공부하는 때라 하겠습니다.

참 의심은 자기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느끼지 못하고 몸, 마음, 세계가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왜냐하면 의정을 일으키는 목적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망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조건이 외부세계이므로 이러한 인식대상인 조건들을 차단시킬 때 비로소 참 의심을 가져서 공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참선의 선결조건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망상을 일으키는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가벼운 의심이 바로 망상을 일으키는 조건을 제거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부에 대한 인식이 끊어지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목적은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것은 자성을 보기 위한 조건입니다. 망상이 제거된 상태에서 무언가를 봐야하는 것이지요. 보려면 깨어있어야 하고 보려면 고요해야 합니다. 호수에 바람이 불면 주변의 산과 나무가 호수에 비치지 않습니다. 망상만 제거하고 보지 않으면 무기無記 상태가 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멍한 상태이지요. 이런 상태를 조심해야 합니다.

망상을 제거했으면 자성을 보는 목적으로 나가가야

처음에 수행할 때는 망상을 제거하는 것도 힘듭니다. 그러니 망상을 제거하는 것 자체가 수행의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런 경지도 상당한 수행을 해야만 올라갈 수 있는 단계지만, 망상을 제거하는 것은 단지 수행의 선결조건임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롯하고 또렷한 이 한 생각은 맑은 가운데 고요하게 비추고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으며, 아주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고 항상 분명하게 지각하니, 식은 불에 연기 피어오르듯 한줄기로 면면히 이어져 끊이지 아니합니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의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며, 더는 화두를 들지 않습니다. 든다면 이는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 격입니다.

망상을 제거했으면 성품을 봐야 합니다. 화두는, 강한 의정은 망상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망상을 제거했으면 지팡이라는 도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는 금강이라는 지혜의 눈동자를 갖춰야 합니다. 지혜가 있다는 말은 헤매지 않고 헷갈리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르고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망상을 제거한다는 수단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미 목적으로 가기 위한 수단을 성취했으면 수단을 버리고 목적을 성취해야 합니다.

오늘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참선의 선결조건, 성품을 보는 것은 참선의 목적입니다.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망상은 조건생 조건멸하는 것이며, 한 생각은 한 찰나에 생겼다 사라집니다. 망상이란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마음이 아닙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마음이라는 말을 혼용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은 성품이고 연기실상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구분하면 망상을 제거하는 길에 쉽게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허운스님은 객과 주인으로 비유했습니다. 자성은 항상 여기에 있지만 망상은 조건 따라 생겼다 사라지므로 객이고, 자성은 허공처럼 고요하고 변함이 없지만 망상은 티끌처럼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이것을 명심하면 망상을 제거하는 마음자세를 갖출 수 있습니다.

망상을 제거하고 나면 참 의심을 가져야 합니다. 망상을 일으키는 조건 중 가장 큰 것은 외부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입니다. 이런 조건을 차단하는 것이 제대로 이뤄졌을 때 비로소 참 의심, 참 의정이 갖춰졌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갖춘 후에는 망상을 없애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을 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금강의 눈동자를 갖추고 지혜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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