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곡(參禪曲)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깐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고무명업식(無明業識) 독한 술에 혼혼불각(昏昏不覺) 지내다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 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한 이 마음을 어이하야 인도할꼬쓸데없는 탐심진심(貪心瞋心)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 분별(許多分別) 날마다 분요(紛擾)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지각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 죽을 줄 모르도다내 마음을 못 닦으면 여간계행(如干戒行) 소분복덕(小分福德) 도무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 보아 하루도 열두 때며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위에 펴놓고 시시때때 경책(驚策)하소
할 말을 다 하려면 해묵서이(海墨書而) 부진(不盡)이라 이만 적고 그치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다시 한 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기 낳으면 그때에 말할테요
중생의 삶은 무명이라는 술에 취한 삶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깐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고
옛날 조사스님이나 수행자들은 1분1초도 아껴서 참선을 했는데 나는 어째서 방일한가, 자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옛 사람들은 참선을 할 때 잠이 오면 송곳으로 찔러 잠을 물리쳤다는데 나는 어째서 이토록 방일한지를 한탄합니다.
경허스님은 조선시대 말의 탁월한 학승이었다고 합니다. 강백이라고 하지요. 경허스님이 젊은 나이에도 경을 아주 잘 보니 강의를 하면 중국 스님들도 몰려들어 그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뛰어난 강사였는데, 이 어른이 잠이 참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경전공부의 한계를 느끼고 참선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여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는데, 앉기만 하면 조는 것이지요. 그러자 칼을 턱밑에 두고 조금이라도 졸면 칼에 찔리도록 아주 독한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예전 사람들은 하루 해가 넘어갈 때 다리를 뻗고 울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오늘도 깨치지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는 통탄입니다. 그 정도로 마음을 내어서 옛 분들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지요.
무명업식(無明業識) 독한 술에 혼혼불각(昏昏不覺) 지내다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 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한 이 마음을 어이하야 인도할꼬
중생들은 무명의 취하여 크게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무명에 빠진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행동, 그로인한 모든 번뇌가 바로 업식입니다. 이 무명업식은 마치 독한 술과도 같습니다. 경허스님이 보기에는 우리 중생들이 독한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혼미하니 깨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신이 멀쩡하다 생각하는데 깨친 이가 보기에는 모두 다 취해서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니 타일러도 들을 생각이 없고, 꾸짖어도 조심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온 자식을 아무리 꾸짖어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아무 소용도 없으니 혼미한 이 중생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할 것인지를 한탄합니다. 경허스님이 볼 때는 중생들이 독한 술에 취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탐심진심(貪心瞋心)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許多分別) 날마다 분요(紛擾)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술에 취하면 구석에서 조용히 자는 사람도 있지만 주사가 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옆에 사람과 시비하거나 힘들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탐심과 진심을 공연히 일으키는 모습입니다. 또한 허다하게 많은 분별심을 냅니다. 분별심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마음, 나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이 더 잘나 보이고 내 집보다 남의 집이 더 커 보이고 때로는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 때, 나는 왜 이렇게 잘났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모두 분별심입니다. 우리는 멀쩡한 정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깨달은 어른이 볼 때는 술 먹고 취해서 부리는 주사라는 것입니다. 참 우스운 모습이겠지요.
불길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삶
지각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 죽을 줄 모르도다
밤이 되면 나방들이 가로등에 마구 몰려듭니다. 촛불을 켜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촛불에 타죽는지도 모르고 그저 불이 좋다고 몰려옵니다. 이것을 불나방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불나방을 보고는 참 한심한 삶을 산다며 혀를 차지만, 깨달은 분이 보기에는 우리들의 삶이 불나방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빛을 탐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무명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인생이 풍전등화인데도 어떻게 공부할 마음을 내겠냐고 하는 경책입니다.
내 마음을 못 닦으면 여간계행(如干戒行)
소분복덕(小分福德) 도무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 보아
하루도 열두 때며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위에 펴놓고 시시때때 경책(驚策)하소
마음을 닦지 않으면 조금이나마 지킨 계행들과 아주 조금의 복덕 역시도 모두가 허사라는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노파심에 이러한 당부를 합니다. 당신이 중생들을 위해서 노래를 짓노니 하루 24시간,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말입니다. 이 노래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언제나 들여다보며 시시때때로 공부하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다시금 당부합니다.
할 말을 다 하려면
해묵서이(海墨書而) 부진(不盡)이라
이만 적고 그치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한 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기 낳으면 그때에 말할테요
경허스님이 중생들을 위해서 할 말이 얼마나 많느냐 하면 바닷물을 모조리 먹 가는 데에 써서 글을 써도 모자라다고 합니다. 할 말이 그렇게 많지만 이쯤해서 그만 적고, 돌장승이 아기를 낳으면 그때에 다시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경허스님의 선사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태껏 참선곡을 배우면서 경허스님 말이 백번천번 옳다고 하며 반성하고 수행할 마음을 내고 있는데, 돌장승이 아이를 낳으면 그때에 다시 말한다고 하니 생각이 탁 막힙니다. “돌장승이 어떻게 아이를 낳지?” “돌장승이 아이를 낳는 때가 언제지?”
경허스님이 던지는 화두
원래 화두는 이렇게 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無)자 화두를 받았다고 합시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을 찾아가서 “모든 중생들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여쭙자, 조주스님이 “없다[無].”고 답합니다. 저 같으면 ‘아, 개는 불성이 없구나.’ 하고 끝이 날 텐데, 그 스님은 조주스님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철석같이 믿는 스님이었습니다. 하늘같이 존경하는 조주스님이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자 ‘어째서일까’ 곰곰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생각에 생각을 하다 보니 깨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화두는 이런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면 첫 번째는 화두를 주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이 있어야 합니다. 무자 화두를 받았다면 “개가 불성이 왜 없을까?” 치열하게 탐구해야 합니다.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하네!” 하면 거기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내 목숨을 버릴 만큼의 존경이 있어야 스승이 내리는 공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안과 화두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공안(公案)은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문서를 말합니다. 옛날에는 관에서 문서가 내려오면 무조건 지켜야 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지요. 이렇듯 화두를 공안처럼 받드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스승인 조주스님이 내린 화두는 무조건 옳은 말인데,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니 생각이 턱 막히는 것입니다. 턱 막혔던 생각이 터지는 순간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행복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온 과보
이렇게 참선곡의 모든 구절 공부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경허스님은 조선후기의 쓰러져가는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근대불교의 큰스승이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것이고, 저는 그렇게 큰스님은 아니라 이렇게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왜 우리는 참선수행을 해야 할까요? 수행을 열심히 하면 좋긴 좋지만, 되지도 않는 것 왜 하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살며 부처님 말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살면서 우리 가족 무탈하고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양심적인 시민으로, 책임 있는 부모로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많은 불자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코로나 팬데믹입니다. 양심적인 시민으로서 그저 내 직업에 충실했을 뿐인데, 직업에 충실하다보니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위기가 오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꼼짝달싹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가족이 불행해졌지요. 개인은 충실히 살아왔을 뿐인데 인류는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중생심으로 바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의 행복, 양심에 따른 삶을 살아온 결과가 오늘날 인간들이 만든 문명입니다.
얼마 전 산책을 하러 나가 무등산 아래에서 무등산 중봉의 설경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멋있다!’라고 생각하고 끝났을 텐데 이날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위의 설경은 너무나 멋있는데 그 밑의 가로등이며 찻길, 휘황찬란한 건물, 지나다니는 차들… 인간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된다고 말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만 년 전에 내가 보았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습니다. 지금과 같은 문명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 년 전의 무등산을 보는 나와 지금의 나는 똑같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핸드폰도 없고 좋은 등산화도 없고 두꺼운 누비옷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의 나는 가로등, 찻길, 버스 등과 따로 분리되어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가 없으면 지금 이 모습의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만 인간적으로, 양심적으로 살아봐야 지금과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선의 목적 = 궁극의 행복 =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것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혼자 잘 살아야 할까요, 궁극적이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요? 99명이 불행하고 나 혼자만 행복하다면 결코 그 행복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행복에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만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려면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적으로 ‘무명을 깨치라’는 부처님 말씀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명에 취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 하나 행복하자, 나 하나 양심적으로 살자 라는 생각으로 하여금 우리 인류는 현재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경허스님이 조금만 늦게 한반도에 태어나셔서 이 시대의 큰스님으로 살고 계신다면 우리들에게 어떤 법문을 하셨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수행은 개인의 깨달음이 개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지향하는 길이고, 궁극적으로 이 사회와 문명이 지구상에서 그나마 유지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코로나시대에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5회에 걸친 법문으로 하여금 참선곡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