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큰스님 나옹스님의 <행선축원>
새벽예불을 드릴 때 칠정례 다음으로 <행선축원>을 독송합니다. 이 축원문은 700~800년 전 고려 말의 스님인 나옹화상이 지은 것으로 전국 조계종 사찰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예경하고 있습니다.
예불에 참석해본 불자라면 ‘지공 나옹 무학 삼대 화상’이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지공스님은 원나라의 으뜸 가는 스님으로 나옹스님의 스승입니다. 그런 지공 스님의 제자 중 가장 탁월한 제자가 나옹스님이며, 나옹스님은 원나라에서 10년간 수행정진하여 지공스님에게 인가를 받은 후 고려로 귀국하여 법을 펼쳤습니다.
다음 화상인 무학스님은 나옹스님 문하의 제자로 그 승풍이 조선시대 사명대사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풍암 영기 선사로 맥이 이어졌으며, 불교의 세력이 다시 쇠약해진 조선 후기에 경허스님이 참선수행 가풍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후 만공스님, 해월스님, 수월스님 등 훌륭한 스님들이 경허 스님 휘하에서 배출되었으며, 효봉스님, 성철스님 등 현대의 큰스님들이 우리나라 선종의 가풍을 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옹스님이 우리나라 불교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나옹화상은 불교가 쇠락하던 고려 말 선종의 기치를 다시 한 번 드높이신 분입니다. 고려 말은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 힘들던 시절이었고, 종교적으로는 보조국사 스님의 정혜쌍수 운동으로 중흥한 불교가 다시 쇠퇴하던 때입니다. 이 때 다시금 불교를 일으키고자 한 스님이 바로 나옹스님인 것입니다.
<행선축원>, 불자라면 누구나 세울 수 있는 서원
‘축원’이라 하면 스님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신도가 많습니다. 새벽에 하는 행선축원이나 사시 축원을 스님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자라면 누구든 원을 세울 때 축원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절에서 예불을 할 때는 사부대중을 대표하여 스님이 축원을 할 뿐이지요. 누구든 하루를 시작하며 행선축원을 독송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행선축원>은 ‘참선수행자가 올리는 축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참선수행하는 수행자가 아닌데’, ‘나는 그냥 절에 다니는 불자인데 왜 나에게 행선축원을 하라고 할까?’, ‘행선축원은 선방 다니는 스님이나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다르다는 생각, 출가자는 할 수 있고 재가자에게는 금기시된다는 생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참선수행자가 올리는 축원’에 담긴 요지는 참선수행하는 수행자는 자기를 위한 수행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행선축원에는 참선수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수행의 이유가 개인의 깨달음이 아닌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수행해야 한다는 질책이 담겨있습니다. 다름 아닌 중생의 성불이 좌선하고 참선하는 목적임을 매일매일 부처님전에 다짐하며,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나옹스님이 당부하신 것입니다. 축원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잘 되게 해달라는 큰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수행자든 일반 재가자든 불자라면 누구나 발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발원 앞에서 평등한 일불제자
출가한 스님과 재가자인 스스로가 다른 존재라고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절에 다니는 이유는 여러분과 스님들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스님들은 조금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수행하고, 재가불자는 현실 여건 상 스님들보다 조금 덜 수행할 뿐이지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는 일불제자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해서 수행정진하는 수행자입니다. 행선축원을 읽을 때에는 이 같은 사실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이 대목에서 어떤 사람은 ‘나는 참선을 해본 적도 없는데. 참선을 먼저 가르쳐주고 축원을 하라고 해야지 앞뒤가 안 맞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공스님의 수제자였으며 뛰어난 참선수행자였던 나옹스님이 염불선 역시도 상당히 강조했다는 사실을 알면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염불선이란 간화선의 방법을 적용하여 염불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 명호를 열심히 외우면서, “염불하는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들어 마음을 집중하고 가라앉혀 삼매에 드는 것이 염불선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염불선 수행자입니다. 절에 와서 예불을 보고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스님이 아니니까 수행자가 아니지’ 라며 스스로를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염불선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매일 아침 행선축원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중생을 위한 참 수행자가 되라는 질책
한편 기복불교가 아닌 참 불교의 관점으로도 행선축원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이 우리 불교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직도 많은 불자들이 기복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수능을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공무원 시험 합격을 바라고, 사업이 잘 되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실 불교는 그런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나는 부처가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처음에는 개인적인 바람, 그야말로 이기심으로 불교를 접하게 되나, 불교를 공부를 하다 보면 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더 큰 원을 세워야 함을 알게 됩니다. 행선축원에는 이처럼 이기적인 마음을 벗어나 중생을 위한 참 수행자가 되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한편, 최근의 트렌드로는 힐링과 명상을 결합하는 것이 유행이기도 합니다. 명상으로 마음을 편하게 하고 산에 와서 고요하게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불교가 삶을 조금 더 안정되고 편안하게 해주는, 일종의 보조제라고 여기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용맹심을 본받아 모든 중생들을 깨치게 하겠다는 것이지, 단순하게 지금의 근심걱정을 덜어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번뇌를 완전히 뿌리뽑기 위해서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수행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힐링하고 가볍게 명상하는 마음으로 불교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나 스스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다짐
비록 나 자신이 미혹한 존재일지라도 지금 하는 이 수행이 모든 존재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야말로 행선축원을 하는 의미이며, 그렇게 실천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번뇌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부처님 가르침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행선축원문을 들여다보면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내가 우리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용맹한 뜻을 세우고, 비로자나 부처님처럼 큰 깨달음을 이루고, 문수보살처럼 큰 지혜를 가지고, 보현보살처럼 행원을 크게 가지고, 지장보살처럼 대원력을 세우고, 관세음보살처럼 중생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투겠다고 서원합니다.
나 스스로가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떻게 감히 나를 문수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지만, 나옹스님은 나 자신이 바로 부처님이고 보살이라는 마음으로 참선수행과 염불수행을 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불교에 입문할 때는 ‘우리 자식 수능 시험 붙게 해달라’는 개인적인 소원으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진정한 불교를 알고자 한다면 ‘문수보살님 같은 큰 지혜와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큰 자비심을 가져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워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모습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올바른 불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돌에 새긴 글씨처럼 크고 단단한 세운 원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은 쉽지만 돌에 글씨를 새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돌에 새긴 글씨는 오래 가지요. 마찬가지로 큰 원을 세워서 크게 깨치겠다는 다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길로 들어서면 다가오는 어느 생엔가 반드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고, 부처님이 증득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불자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불보살의 마음으로 수행하세요. 나는 부처님과 다르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부처님과 중생이 달리 있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내 마음 속에서부터 없애야 올바른 불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치면 부처고 미혹하면 중생입니다.
차별은 우리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번 뿐인 인생, 나는 보고 싶은 거 보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즐길 거 즐기고, 괴로운 건 피하면서 그렇게 즐거운 중생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중생과 부처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참 수행자가 되어야만 약간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잠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이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행선축원>에서 나옹스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