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만나는 명상
얼마 전 템플스테이에 온 20대 초반의 친구들에게 차를 대접하는데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스님, 명상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특한 마음에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왜 하필이면 기도도 아니고 참선도 아니고 명상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얼마 전에 서울에서 불교박람회를 하는데 그 주제가 명상이었습니다. 280여 개 단체가 참가했고, 사흘 동안 61개 단체가 개설한 명상 수업을 1천 명 이상이 수강했고, ‘명상 컨퍼런스’는 사전예약이 다 매진됐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명상이라는 게 우리 사회 속에 깊숙하게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템플스테이에 온 앳된 친구들이 명상을 궁금해 하는 거고요.
저는 여기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 내지는 부처님 이전의 인도사회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명상의 역사는 3천 년이 넘었는데 왜 이제서야 사람들이 명상을 찾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초사흘법회의 주제를 명상의 시간으로 잡은 이유입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명상
유튜브에서 명상을 검색해봤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상품이나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서 명상을 하는지를 찾아봤습니다. 내용은 보지 않았습니다만 제목은 주로 이렇습니다. ‘하루를 바꾸는 5분 명상’, ‘몸의 기운을 맑게 해주는 10분 몰입 영상’, ‘불안한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평화명상’, ‘10분 안에 해소 명상’….
제목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몇 분 안에 다 끝낸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스트레스 해소, 마음의 평화, 휴식, 불안 제거 등 뭔가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불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명상은 예를 들면 선방 스님들이 하루에 열 시간씩 참선을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명상은 오 분, 십 분으로 짧습니다. 종류도 차명상, 향명상, 소리명상, 촛불명상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불교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명상이 상당히 다양한 종류로 일반인들에게 스며들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명상의 정의를 찾아보니까 눈감을 명[瞑]에 생각할 상[想], 눈을 감고 고요히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명상의 목적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내면의 평화를 찾고, 마음을 훈련시키는 것이며 명상의 방법은 무수하게 많더라 하는 내용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첨부됩니다. 명상을 하면 뇌파가 어떻게 변하는지, 생체 호르몬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등입니다.
힐링 열풍에 이은 명상 열풍?
명상의 목표는 말 그대로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 때 명상이라는 표현보다 더 대중적으로 친숙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힐링입니다. 힐링(healing)은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 힐링 열풍이 불었던 때가 있습니다. 보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음악을 듣는다든가 여행을 간다든가 템플스테이를 가서 휴식을 취한다든가 한방테라피를 한다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표는 내 마음의 평화를 기하는 건데 실제 뚜껑을 열어놓고 보니까 상품입니다. 일종의 힐링 마케팅과 결합한 힐링 열풍이 이제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명상이라는 것은 크게 바람을 타지 않고 결과적으로 오늘에 봤을 때에도 꾸준히 우리사회 여러 요소요소에 스며들어 왔습니다. 앞서 말한 명상을 주제로 한 불교박람회도 그 반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명상이 이제는 라이프스타일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수치적으로 보면 미국의 경우 최근 1년 동안 명상을 한번이라도 해본사람이 전체 미국 인구의 10프로가 넘는답니다. 열 명 중 한 명 이상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명상 프로그램에 참가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명상이 더 대중화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같은 경우 힐링 상품, 힐링 마케팅 등으로 힐링에 대한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면, 미국 같은 경우는 명상이라는 콘셉트가 상당히 대중화되어있다는 겁니다.
불교의 명상, 계정혜 삼학을 닦는 수행의 일환
여기까지만 보면 힐링의 외형은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명상과 일반사회에서의 명상은 목표하는 바가 다릅니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보편화되어있는 명상은 바쁘고 힘들고 괴롭고 불안한 이 현실에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의 참선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참선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불교의 수행과 불교 바깥에서 대중화되고 있는 명상은 어떻게 다를까요? 먼저 가장 구체적으로 불교의 수행은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근, 정념, 정정을 말합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공인된 수행법입니다. 팔정도대로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팔정도를 다른 말로 바꾸면 계정혜(戒定慧) 삼학입니다. 정견, 올바른 견해는 바로 지혜[慧]를 말하는 겁니다. 불교에서 지혜는 무엇입니까? 무명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정사, 정어, 정업, 정명이 계(戒)에 해당합니다. 정어는 잘 아시겠지만 네 가지 업을 짓는 말을 하지 말고 올바른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계율에 해당합니다. 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진치 삼독에 휩쓸리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지혜로운, 무명을 떨쳐낸, 올바른 생각을 하라는 것이 정사입니다. 정업은 몸으로 나쁜 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으라는 것이며, 이 세 가지를 총괄해서 슬기로운 생활을 하라는 것이 정명입니다.
정근, 정념, 정정 이 세 가지는 선정[定]에 해당합니다. 올바른 정진을 꾸준히, 황소걸음처럼 뚜벅뚜벅 하는 것. 이 세 개를 합쳐서 선정이라고 합니다.
즉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이며 이것이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참선만 열심히 하라고 부처님이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먼저 계율을 지켜야 선정에 들 수 있으며 선정에 들어야 무명을 걷어내고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명상에 해당하는 참선을 하려면 그 전에 올바른 견해를 세워서 지혜를 밝히고, 계를 지켜야 합니다.
불교 수행으로써의 명상, 불교 밖의 명상
지금 일반인들의 삶 속에 라이프스타일처럼 스며들고 있는 명상은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내면의 중화, 내 마음이 깨끗해지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명상을 하기 전에 먼저 행이 올발라야 합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것을 강조를 하고 명상을 함에 있어서도 목표를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의 수행과 불교 밖에서 말하는 명상의 차이입니다.
사실은 불교인데 불교가 아닌 것 같은 콘텐츠가 불교 밖에 많이 퍼져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명상입니다. 서두에 언급한 명상에 대해 물어본 젊은 친구처럼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이 시대에 처음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1천 년 전 당송시대에 참선이라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선종이라는 것은 당시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불교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불교라 함은 화엄종이나 법상종, 유식종 같이 교학체계가 잘 짜여있는 것이고 그것을 다 공부하려면 오직 엎드려 책만 봐야 하는데, 어느 날 달마대사라는 분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화두만 깨치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기존의 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불교가 등장하자 당시의 사대부들이 간화선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데요.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니까 당대의 큰스님이었던 대혜스님에게 여쭙니다. 대혜스님이 송나라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 바로 <대혜보각선사서>, 줄여서 서장이라고 합니다.
<서장>에 나타난 당송시대 명상 열풍
서장은 화두 공부하는 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대부들이 이를테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인가, 화두를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개도 불성이 있는가, 개는 하급한 중생이니까 불성이 없는 것인가 이렇게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대혜스님은 화두를 드는 법에 대해 설명하고 제가 아까 말한 것과 같은 불교의 수행법 즉 계정혜 삼학을 이야기 합니다. 왜 항상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 화두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먼저 생활이 반듯해야 한다는 계행을 강조합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스님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어보자 대혜스님이 대답합니다. “명상은 이렇게 하는 건데 명상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먼저 계를 잘 지켜야 하고 네가 명상하는 이유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은 깨달음을 얻어야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일시적인 마음의 행복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네가 명상을 하는 목표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다. 이것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출가하면 서장을 꼭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간화선의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인 지금도 보면 밖에 사람들은 사는 게 쫓기듯이 바쁘고, 시간이 없고, 각박하고, 팍팍하고, 괴롭고 힘들고, 그래도 마음이 좀 편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 불교에 명상이라는 게 있으니까 내 마음이 편해지는 힐링의 방법으로 명상이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힐링 추구는 종교적 갈증에서 온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힐링을 원합니까? 기실 힐링을 원하는 것은 종교적인 갈증에서 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 갈증을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로 채우기도 하고, 또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명상을 통해서 채우기도 합니다. 이 두 경우는 아주 정반대의 경우 같지만 사실 유발되는 지점은 같습니다.
종교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한때는 신이 모든 걸 다 지배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입니다. 그런데 산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철학이 가장 먼저 종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돈은 탐욕스러운 것이고 불결하니까 돈을 벌지 말라는 겁니다. 아닌데. 나는 이러면 안 되는데. 거기에서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나옵니다. 신이 먼저가 아니고 인간이 먼저다. 그게 뭡니까?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가 발현한 뒤에는 교회에서 정치가 떨어져 나옵니다. 왕과 교황이 분리됩니다. 그 다음에는 돈을 네 마음대로 벌어라 하면서 경제활동이 떨어져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도덕과 윤리가 종교와 또 분리되고,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만 남게 됩니다.
요즘 같아서는 사람들이 신도 없다고 떨쳐내고 그 자리에 과학이 들어섭니다. 옛날에 신이 차지하던 자리에 과학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신도 사람들의 생활에서 멀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남는 것은 종교적 갈증뿐입니다.
불자들이 유념해야 할 명상의 본질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절에 오시는 분들도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 때 여러분은 본질을 바로 보셔야 합니다. 불교 수행은 팔정도이며,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이 세트로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고 올바른 생활만을 한다고 해서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팔만대장경을 달달달 외울 정도로 부처님 말씀을 꿰차고 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온종일 정말 통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앉아서 참선을 한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정혜는 세 개가 같이 가야합니다.
사실은 기도도 명상의 일부분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 마음을 잘 살피고 마음이 잡생각 안 하고 기도하는 그 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면 그게 명상입니다. 굳이 명상이라는 표현을 쓰니까 다른 것 같지만 사실 우리 불자들은 명상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게 명상인지 모를 뿐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불교의 수행법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걷어낸 후 그 위에다가 어떤 옷을 입혔습니까? 과학이라는 옷을 입혔습니다. 또 뭐든지 사람들이 혹하는 멋있는 영어로 이름 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명상의 본질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찾는 계정혜 삼학이 항상 같이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고서야 지금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고 있는 명상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