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전에 8 (해제)

‘영가전에’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부처님께 의지하여 삼독심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왕생을 하기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버리고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삼독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욕망하는가가 아닌 ‘무엇이’ 욕망하는가를 바로 봐야 한다.
욕망하는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욕망이 강해지고, 집착이 되고, 소유하는 마음이 커지고, 종국에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더욱 견고해진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는 수행은 죽음을 통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다.

영가전에 해제 ; 죽음을 생각하라

백중 입재부터 초재, 6재에 걸쳐 <영가전에>를 구문별로 살펴보았습니다. <영가전에>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부처님께 의지하여 삼독심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서울을 가고 싶은데 부처님께 의지하여 삼독심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면 서울에 갈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서울에 가고자 한다면 지도에서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고 서울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 번화가는 어디인지 등 서울에 관한 지식을 찾아야 합니다.

극락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마음을 통찰해야

그런데 극락에 가고자 할 때는 극락이 어디에 있고, 극락이 어떻게 생겼고, 극락의 중생들은 어떻게 살고, 극락의 기후는 어떻고 등등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처님께 의지해서 삼독심을 버리고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뭔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맛보는 것 등의 대상을 조사하고 탐구하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무엇이 보는지, 무엇이 듣는지, 무엇이 맛보는지를 제대로 통찰해야 극락에 갈 수 있습니다.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무엇이’ 욕망하는지 스스로의 내면으로 돌이켜봐야만 극락에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혼자 하는 것이 버겁고 힘들기에 부처님께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 삼독심으로 물들어 마음의 눈이 멀었기에 내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켜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독심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곧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극락에 갈 수가 있다고 누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욕망하느냐가 아닌 ‘무엇이’ 욕망하느냐

극락에 가고 싶어 하는 경우에는 앞서 말했듯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무엇이 욕망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의 삶에서는 욕망의 대상에 마음이 먼저 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욕망이 나의 내면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막고, 오직 욕망의 대상에게 마음이 달려가도록 종용합니다. 그것이 욕망이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원한다면 차 연비, 가격, 디자인 등 오로지 자동차에 대해서만 집중하게 됩니다. 욕망이 욕망하는 대상으로 마음을 끌고 갑니다. 욕망이 강해지면 거기에서 집착이 나옵니다. 욕망이 강해지면 집착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소유하는 마음이 생기면 당연히 스스로 자문하게 됩니다.

‘무엇이 소유하고자 하는가?’

우리가 떠올리는 답은 ‘나’입니다. ‘내가 소유하고자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욕망이 강해지면 집착이 강해지고, 집착이 깊어지면 소유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고, 소유하는 마음이 커지면 나라는 생각이 더 견고해집니다.

이런 악순환을 계속해서, 매 찰나찰나, 매 순간순간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삶이며, 이러한 중생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이미 오래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와 육신을 동일시하는 지점에서 출발하면 됩니다. 나와 육신이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육신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육신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몸뚱이가 나고 내가 이 몸뚱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 중 하나입니다. 몸뚱이와 나를 분리하는 것, 떼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올바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영가님에게처럼 살아있는 우리도

<영가전에>는 영가들에게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삼독심을 버려서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극락에 갈 수 있으니 이 육신이 내 것이라는 집착을 버리라고 당부하는 경전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스럽게도 영가님들은 이 생을 떠나는 분들입니다. 몸은 이미 이승에 두고 떠나왔는데 마음이 아직까지 자기 육신을 떠나지 못한 분들에게 옆에서 일러주기만 하면 영가님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육신에 대한 집착, 육신을 나로 생각했던 미혹한 마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같은 맥락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중생들이 생각할 때 ‘내가 살아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언가 성취하고 자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는 모든 감정과 노력, 의지는 오로지 하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곧 나라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온갖 번뇌망상이 피어오릅니다.

이승에 육신을 두고 떠나는 영가님들에게 집착을 버리고 떠나라고 하듯이 살아있는 우리들도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몸이 곧 나라는 생각을 떨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겨납니다.

이 세상을 욕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생들의 마음이 욕망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항상 마음을 욕망하는 대상으로 향하게 합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차단하고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게 만드는 것이 욕망이 하는 일입니다. 삼독심에 눈이 멀어서 이 육신이 내가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하지만 육신과 나를 분리하는 것에서부터 행복으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죽음을 바로 보라

티벳불교에서는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을 수행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내 안의 삼독심을 털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나라는 것이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욕망이 집착을 낳고 집착이 소유를 낳고 소유가 내가 있다는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욕망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영원한 행복, 진정한 행복으로 갈 수 있고요.

육신과 나를 분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을 생각하는 것, 죽음을 통찰하는 것,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수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죽음을 깊이 명상한다는 것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지 알고 있는 것과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는 것은 다릅니다. 알고 있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은 다르지요.

인문서 <사피엔스>를 펴낸 유발 하라리의 저서 가운데 <극한의 경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전쟁이 인간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하는가를 탐구한 책으로, 한 인간이 평생을 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을 전쟁은 단 10분 만에 깨닫게 해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의 경험을 통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전쟁을 겪기 전의 나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살아있다’는 사실, 너무나 강고하고 철두철미한 이 기본적인 사실이 전쟁터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는 철저하게 부정됩니다. 매 찰나찰나 죽을 수 있습니다. 고개만 잘못 돌려도 총에 맞아 즉사하는 그 현장에서는 역설적으로 매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삶을 느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 역시 뼈저리게 느끼지 못합니다. 삶은 진정으로 축복이고 고마운 것인데 단 한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 이 육신이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서 죽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육신에 대한 집착, 팔법에 대한 집착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쟁과 같은 극한의 경험은 생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수행을 통해 매순간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티벳불교에서는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는 수행을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금 생, 즉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팔법(八法)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팔법이란 자신을 칭찬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칭찬해주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고 도와주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 누군가 내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것, 누군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에게 좋은 일만 생기고 즐거운 감정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방도가 바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완전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고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불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나무의 열매를 탐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곧 망치와 같습니다. 망상과 허물을 깨부수는 망치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이 망치가 없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을 명상하는 방법

어떻게 하는 것이 죽음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가장 좋은 경우는 전쟁터의 일화처럼 극한의 경험을 하는 것이지만, 우리 일상에서는 그러한 경험을 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대신에 죽음 자체를 명상할 수는 있겠지요.

첫째,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수명은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사는 동안 수행할 시간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죽게 되는 원인은 많고 살 수 있는 기회는 적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재물도, 친지도, 육신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러한 사실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완전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쉬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 자기 전에 이불을 펴고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울 때마다 이것이 바로 시체를 싸는 천이라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죽음을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얼마나 내 몸을 사랑하는지 자각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흔히 소화가 조금만 안 되도 걱정이 되고 혈압이 조금만 높아도 전전긍긍합니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 몸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몸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만지려고도 하지 않는 시체와도 같습니다. 인도 바라나시 화장터에서 볼 수 있는 뼛조각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마음으로 죽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삼독심을 버려서 청정한 마음으로 진정한 행복으로 갈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영가전에>는 기실 영가님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영가전에>를 보고 그런 마음으로 매일매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지금의 위중한 시국이 불법을, 죽음을 마음으로부터 공부할 수 있게 하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확산시키고 있는 일부 사회 구성원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쏟기 전에 ‘나는 절대로 코로나에 걸리면 안 돼’라는 마음에 안달복달하기 전에,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죽음에 대한 교훈을 마음으로 느끼도록 합시다. 이 기회를 수행의 발판으로 삼아 그야말로 머리로 하는 수행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수행의 시발점으로 삼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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