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전에 7

불교에서는 중생들의 삶의 형태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태어나는 찰나 ‘생유’, 임종하는 찰나 ‘사유’, 태어나 죽기까지의 인생 ‘본유’, 임종 후 다음 몸을 받기 전까지의 상태 ‘중유’ 등이다.
이 중 태어나는 순간과 임종의 순간은 아주 중요한 순간으로 정의된다. 임종하는 찰나의 마음이 다음 생유의 마음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임종하는 순간에는 육신에 대한 애착, 가족에 대한 애착 없이 오로지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 마음으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상이며 이미지라는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여남은 애착마저 다 놓고 극락세계에 가서 좋은 몸을 받아 태어나시라는 당부로 ‘영가전에’는 마무리 된다.

#수행, 윤회, 제사, 죽음, 천도재

백중맞이 <영가전에> 특강 7

영가시여 사바일생 다마치는 임종시에

지은죄업 남김없이 부처님께 참회하고

한순간도 잊지않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첩첩쌓인 푸른산은 부처님의 도량이요

맑은하늘 흰구름은 부처님의 발자취며

뭇생명의 노래소리 부처님의 설법이고

대자연의 고요함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

애착하던 사바일생 하룻밤의 꿈과같고

나다너다 모든분별 본래부터 공이어라

빈손으로 오셨다가 빈손으로 가시거늘

그무엇을 애착하고 그무엇을 슬퍼하랴

그무엇에 집착해서 훌훌털지 못하는가

그무엇에 얽매여서 극락왕생 못하시나

저희들이 일심으로 독송하는 진언따라

이생에서 못다이룬 온갖애착 버리시고

맺은원결 모두풀고 지옥세계 무너져서

아미타불 극락세계 상품상생 하옵소서

이번 구절은 임종하는 순간에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오로지 부처님만 생각하면 어디로 가든지 모두 극락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삶을 영위하는 길고 긴 인생 중에서 한 찰나의 순간, 임종의 순간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중생 삶의 형태: 생유, 사유, 본유, 중유

불교에서는 중생들의 삶의 형태를 크게 생유, 사유, 본유, 중유 등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생유(生有)는 태어나는 찰나, 사유(死有)는 임종하는 찰나, 생유와 사유 사이의 인생인 본유(本有), 사유와 생유 사이 즉 임종 후 다음 몸을 받기 전까지의 형태를 중유(中有)라고 합니다.

생유와 사유는 각각 한 찰나에 불과한데 아주 중요한 존재의 형태로 규정하고 있지요. 이처럼 태어나는 순간과 죽는 순간은 인간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 찰나가 바로 본유의 형태를 규정짓기 때문입니다. 임종하는 그 찰나의 마음이 다음 생유의 마음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임종하는 순간의 마음을 남방불교에서는 아왕가라고 표현하고, 생유하는 그 찰나의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전생과 지금 생을 연결해주는 마음인 것입니다.

임종 찰나의 마음이 마음 생의 결정적 조건

그 마음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임종하는 찰나의 마음입니다. 재생연결식의 마음이 조건에 따라 정해지면 그 다음부터 임종하는 순간까지의 마음을 ‘존재지속식’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를 나로 있게 하는, 존재를 지속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지속식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우리 같은 범부들은 당연히 모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파헤쳐봤을 때 알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렇듯 임종하는 순간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만약 임종하는 순간에 괴롭고 고통스러워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찼다면 다음 생에는 아수라와 같이 화내고 분노하고 짜증내는 마음이 가득 찬 마음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임종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떠나려니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임종하면 다음 생에는 욕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 집착하는 마음 생기지 않도록

<영가전에>에서는 임종하는 순간에 부처님만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 마음으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만 생각하라는 말을 수행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삼매에 들라는 이야기입니다. 번뇌에 휩싸이지 않고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인 삼매인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다음 생에는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마음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범부 중생의 상식으로는 임종이 다가오면 가족들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가족으로써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고인의 입장에서는 지금 생에 대한 애착을 더 크게 만들지 않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가족들이 정신적인 지지를 보내야 합니다.

불교의 불성사상, 힌두교의 범신론

다음 구절에서는 불성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간화선에서는 모든 중생들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부처가 될 종자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더 확장하면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우리는 이미 부처라는 것이 간화선의 사상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확장해서 자연을 지배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 육신을 이끌고 지배하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듯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자연의 모든 것에 신의 손길이 녹아들어 있다는 생각이 바로 범신론입니다. 이런 사상은 오늘날 서구사회를 지배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있었고 불교가 탄생한 인도사회에도 존재했습니다.

인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신이 있는데, 이 모든 신들의 배후에 이 세계를 주재하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브라흐만이며, 브라흐만이 세계의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인들에게 열반이란 범아일여, 즉 브라흐만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했을 때만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다. 반면 불교의 핵심은 공성입니다. 존재라고 할 것이 없지요.

힌두교 브라흐만에 대한 불교식 재해석

인도에 불교사상이 등장한 이후 출가승 중심의 불교가 차츰 신행생활 중심의 대승불교로 발전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인도사회의 문화와 사상,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힌두교의 신들 또한 불교로 유입됐습니다. 제석천과 같은 신들이 불교의 교리를 입은 캐릭터로 다시 설정된 것입니다.

브라흐만 사상도 그중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브라흐만을 ‘자연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처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불성사상은 인도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힌두사상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출가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기도하고 신행생활을 하고 공덕을 쌓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중요한 틀입니다.

이 대목은 일반적인 종교학에서 말하는 범신론적인 관점에서 보기보다 불성사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올바릅니다. 사람만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라는 문장은 결국 불교의 세계관을 압축한 문장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을 간단하게 말하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

지구상에 백억 명의 인구가 있다면 지구상에는 백억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모두 다릅니다. 우리가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와 항상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이며 세계입니다. 누구나 다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그 무엇은 각각의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 다릅니다.

흔히 일체유심조를 ‘마음먹기 나름’, ‘마음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체유심조의 본 뜻은 일체라는 것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상이며 이미지인데 실제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똑같은 세상이지만 불심으로 바라보면 불국토이고 범부들의 눈에는 사바세계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성계와 서산대사의 대화에 이런 이치가 녹아있다. 이성계가 서선대사를 놀리기 위해 “대사님은 돼지처럼 보입니다”라고 하자 서산대사가 답하기를 “당신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세 개의 진언으로 <영가전에> 마무리

다음은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그동안 마음속에 있던 집착을 털어버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영가님을 위해서 좋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도 마음속에 애착이 남아있느냐고 물으며, 여남은 애착마저 다 놓으라고 당부합니다. 하여 모든 애착과 원결을 풀고 극락세계에 좋은 몸 받아서 태어나시라고요.

<영가전에>는 세 개의 진언으로 끝납니다. 파지옥진언과 해원결진언, 상품상생진언입니다.

진언(眞言)이라는 것은 참된 말이며 진리의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옴 가라지아 사바하’라는 진언이 있을 때, 이 진언을 풀어서 해석하면 진리가 담겨있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진언은 그 자체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 진언을 소리내어 말하면 나와 하나가 되고 그 힘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언을 외우고 주력을 하는 이유입니다.

주력을 하는 전통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부처님 당시에는 주력을 하지 않았으나 인도사회에서는 주력이 전통적인 수행의 방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문화를 불교가 수용한 것이고, 후기 대승불교에는 밀교라는 형식으로 발전하여 원형 그대로 티벳에 전승됩니다.

남방불교는 부처님 당시부터 아소카 대왕 재위까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티벳불교는 그 이후에 발전한 후기 대승불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불교는 티벳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티벳불교가 고려 후기에 원나라(몽고)를 통해 우리나라로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진언을 독송하는 것으로 <영가전에>의 모든 독경이 끝납니다. 백중을 맞아 <영가전에>를 외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영가님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는 어떤 발원을 세워야 할지 이번 <영가전에> 특강을 통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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