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배터리

자동차가 잘 달리려면 평소에 고장이 없는지 확인하고 꾸준히 주행하여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해야 하듯, 수행에도 배터리 충전이 필요하다.
수행을 해야 수행할 수 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평소에 꾸준하게 예불하고 기도해놓아야만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됐을 때 자연스럽게 부처님에게 기대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 하기 싫어도 하고 바빠도 하고 습관적으로 그냥 하는 예불과 수행. 이것만이 우리를 부처님처럼 가는 길 위로 인도한다.

수행의 배터리

자동차가 잘 달리려면?

오늘은 수행을 왜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하고자 합니다. 요즘은 차들이 잘 나와서 그런 일이 없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전 초보자들이 많이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배터리 방전입니다. 실내등이나 전조등을 켜놓은 상태로 시동을 꺼버리면 이후에 자동차를 탔을 때 배터리가 다 나가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던 일을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것입니다.

여러분, 차가 잘 달리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우선 평소에 정비를 잘 해서 고장이 안 나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운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차가 달립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로 기름이 없으면 차가 못 갑니다. 네 번째 정비도 잘 하고 운전사도 있고 기름도 있는데 시동이 안 걸리면 차가 못 움직입니다. 차가 공장에서 출고될 때는 배터리가 충전이 되서 나오지만 그 다음에부터는 차를 계속 운행해야 자연스럽게 배터리가 충전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내가 불교에 대한 지식이 많고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어도 수행을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동차로 이야기하면 아무리 좋은 차가 있어도 차고에만 넣어 놓고 운행하지 않으면 차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딸린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버느라 바쁘다면 아무리 수행을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절에 나와서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은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분들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동차는 달려야 달릴 수 있다

두 번째로 수행을 하더라도 몇 번 하다가 그만두고 조금 하다가 ‘별 거 없네’ 하고 관둔다면 마치 배터리가 방전된 차와 같습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좋아도 관리를 안 해서 툭하면 방전되어 있다면 그 차는 자동차로써 제대로 역할하지 못합니다. 방전된 차가 스스로 달리지 못하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는 수시로 운행해야만 배터리가 충전되어 내가 원하는 때 차를 운행시킬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달려야 달릴 수 있습니다. 수행도 수행해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동어반복인 것 같습니다만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신도가 저를 찾아와서 “이번에 자식이 공무원 시험을 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비법이 있는데 보살님께만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공부 잘 하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대안이 아닙니다. 수행을 잘 하려면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열심히 수행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열심히 수행하고 열심히 살고 싶은데 인생살이 고달픕니다. 마음이 고통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슬픔, 괴로움, 분노, 우울, 무기력, 권태, 짜증, 고통이라는 번뇌로 마음이 가득 차있다면 수행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표현을 바꾸자면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된 겁니다. 인생을 내가 원하는 바대로 살아야 하는데 배터리가 나가서 몸도 마음도 말을 안 듣는 겁니다. 마음이 번뇌로 가득 찼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인생의 배터리가 나갔다는 말입니다.

번뇌는 안에서 생긴다

인생의 배터리가 나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마음의 고통이 왜 생깁니까? 그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밖에서 불어오는 거친 역경이 마음의 고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무명이 번뇌를 만든다.”

예를 들어 오전에는 날씨가 좋았는데 오후가 되니까 먹구름이 끼어서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다고 합시다. 내일 소풍을 가기로 되어있는 아이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똑같이 하늘이 먹구름이 가득한 상황에서 몇 달 동안 가뭄이 들어 고생했던 농부라면 마음이 설렐 것입니다. 먹구름이 아이에게 걱정을 준 것이 아니고, 먹구름이 농부에게 기쁨을 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먹구름이 그것을 준 것이라면 먹구름 안에 걱정이나 기대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해서 내가 짜증이 났다면, 말 속에 짜증이라는 것이 들어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그 말을 듣고 짜증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직 나만 짜증이 난다면 말 속에 짜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만큼 못난 놈이 아니다’라는 내 마음이 짜증으로 바뀐 것입니다. 외부의 무언가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무명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번뇌로 가득 찬 마음, 수행할 여유가 없을 때

번뇌가 외부에서 왔든 내부에서 왔든 어쨌거나 지금 내 마음이 고통으로 가득 차있어서 수행을 할 여유가 없다고 한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가 첫 걸음마를 떼려면 천 번 이상을 넘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나는 백 번 천 번 넘어져도 기필코 걷고 말거야’ 하는 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이렇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불굴의 의지로 무장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두 발로 걷고 싶은 본능적인 의지가 있을 것입니다만,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주위의 모두가 두 발로 걸어 다니니까 나도 모르게 나도 두 발로 걸어야 하나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주변에 사람이 없고 동물들밖에 없다면 두 발로 걷기 위해서 수천 번을 넘어질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걸음마를 하려는 아이가 걸으려다가 넘어지면 옆에 있던 어른이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합니다. 그러면 넘어져도 또 한 번 일어나서 걷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넘어져도 부모가 붙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일어나서 걷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아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있기에 천 번 이상 넘어져도 걸음마를 자기 힘으로 뗄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부모가 있다면 우리 같은 불자들에게는 누가 있습니까? 부처님이 있습니다.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만사가 귀찮고 마음속에 슬픔만이 꽉 차있을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분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실제 눈에 보이는 실체로 존재하여 넘어지면 붙잡아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부처님에게 기댄다는 것은 나도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열망,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앞서 말한 인생의 힘든 시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귀의하는 마음은 꾸준한 수행이 만들어 놓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 기대는 마음이 어떻게 하면 생기냐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평소에 꾸준하게 예불하고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기 싫어도 하고 귀찮아도 하고 바빠도 하고 습관적으로 해야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이 마음이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붙잡아주고 일으켜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때 나를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은 꾸준한 수행입니다. 수행을 꾸준히 하려면 수행의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행의 배터리를 충천하려면 부처님에 대한 존경,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 열망이 내 안에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수행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려면 이유가 없어도 당장 끌림이나 성취가 없어도 빠뜨리지 않고 기도하고 예불해야 합니다.

매일 하는 기도의 힘

제가 강원에 다니던 시절, 1년 365일 동안 4년을 예불했습니다. 매일 새벽예불을 하고 <금강경>을 독경하고 108배를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구정이나 추석이나 방학이나 상관없이 했습니다. 한여름에는 모기가 장삼을 뚫고 한겨울에는 법당 안으로 칼바람이 들어와도 그저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하기 싫었겠습니까.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하는 생각이 왜 안 들었겠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한 것은 4년을 통틀어서 정말 몇 번 안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강원을 졸업하고 보니 그것이 나도 모르게 길러진 습관이고 힘이었습니다. 말사에 와서 절을 운영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단지 기도를 하는 것뿐입니다. 신도가 한 명이어도 두 명이어도 개의치 않고 백일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 때 옛날 생각이 나는 겁니다.

‘내가 그 때 그렇게 고생한 덕에 지금은 이렇게 아무도 없는 절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함께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아무 생각 없이 예불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구나. 나에게 예불하고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누가 나에게 기회를 줬습니까? 고생하던 시절의 내가 줬습니다. 그 때 고생하지 않았다면 백일기도를 할 생각도 않았을 겁니다. 사람도 없고 힘드니까 말사 주지 안 할란다 하고 가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고생으로 하여금 지금도 예불해야 하면 예불하고 기도해야 하면 기도하고 절해야 하면 절하는 겁니다.

예불과 기도는 하기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바쁘면 거르거나 기분 좋으면 두세 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수행의 배터리가 충전됩니다.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어야 내가 진짜 힘들 때, 인생에 역경이 닥쳐왔을 때 이 내 마음의 번뇌를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수행은 다른 것 없습니다. 내 마음의 번뇌를 스스로 살피고 ‘아 내가 지금 힘들어 하는구나’ 알아차리고 번뇌를 녹이는 것입니다.

포인트를 적립해놓고 SOS를 치라

여러분.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되면 불보살님에게 SOS를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아무에게나 응답하지는 않습니다. 평소에 포인트를 적립해 놓아야 합니다. 포인트 적립이란 하기 싫어도 예불하고 바빠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고 평소 열심히 기도하고 예불합시다.

마지막으로 합장하시고, 저를 보지 말고 제 뒤의 부처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소리내어 독송해봅시다.

부처님 사랑합니다.

부처님 존경합니다.

부처님처럼 살겠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Previous

보왕삼매론(2019)

그랬구나

Nex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