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불교

차라리 혼자가 나아

둘이 살아 괴롭느니 혼자 괴로운 게 낫다?

지난주 수요야간법회에서 관용을 주제로 법문을 한 후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참견하기를 좋아하고 집단의식이 강한 사회이지만 관용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합리적인 이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지난 주의 내용은 우리 현실을 100%로 담아내지 못한 이상적인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나홀로족이 대세입니다. 나이를 떠나서도 그렇고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생각과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맞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한구석에 품고 있던 차에 ‘둘이 살아 괴롭느니 혼자 괴로운 게 낫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이 말이 몇 년 전부터 상당히 자주 쓰이는 유명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듯 통계적으로 2000년 기준 우리나라 4인 가구는 400만 세대였는데 2017년도에는 350만 가구 정도로 줄었다고 합니다. 1인 가구 즉 나홀로족의 경우 2000년 기준 222만 가구에서 2017년 560만 가구로 거의 3배가 늘었습니다. 수치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족 형태는 1인 가구입니다. 불과 15년 만에 그렇게 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남해바다 위에 아무 맥락 없이 섬들이 흩뿌려져 있는 것처럼 각각 따로따로입니다. 현실적으로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1인 가구로 흩어져 살고 있는 반면, 의식은 집단적 의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생각과 생활이 따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노령 인구에서 급증하는 ‘황혼이혼’과 1인 가구

1인 가구의 연령대는 다양합니다만 특히 최근 15년 동안 55세부터 65세까지의 1인 가구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35세 미만 1인 가구는 2000년도 80만 세대에서 2017년도 160만 가구로 두 배가 늘어난 반면, 55세부터 65세까지의 1인 가구 수는 30만 가구에서 100만 가구로 3배 넘게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나잇대 1인 가구 구성의 이유는 황혼이혼이 전체의 35%를 차지합니다. 저는 여기에 오시는 신도님들을 볼 때 여러분의 가정이 다 행복할 것이라는 아무런 근거 없는 전제를 두고 있지만 통계학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가정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비슷한 알고리즘의 동영상이 자동으로 추천됩니다. ‘황혼이혼’에 대한 동영상을 하나 봤다 하면, 그 다음에 ‘황혼이혼을 극복하는 슬기로운 방법 5가지’, ‘중년부부 무엇이 문제인가’ 따위의 동영상이 재생되는 식입니다. 그 동영상에서는 황혼이혼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입니다. ‘현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라.’, ‘남자는 사랑해를 여자는 고마워를 많이 하라.’ 그런데 그걸 누가 몰라서 못 합니까? 입에서 안 나오니까 못 합니다.

며칠 전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 표류해서 4년 동안 살다가 구출돼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무인도에서 너무 심심한 나머지 배구공을 하나 놓고 배구공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을 걸고 화도 내고 또 화해하기도 합니다. 그 장면을 보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의 색’이 아닌 ‘내가 덧칠한 색’을 보고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에게 나의 감정을 덧칠합니다. 사람 내지는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한 것일수록 그것에 감정을 칠하고 또 칠합니다. 오래 산 부부 같으면 30년 이상을 계속 덧칠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덧칠한 부분이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졌을 것입니다. 이 때 내 감정으로 덧칠하기 전 그의 원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요? 원래의 모습이 과연 내 눈에 보일까요?

우리는 흔히 밖에서 잘 모르는 사람한테도 속마음을 털어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배우자의 얼굴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왜입니까? 내가 그에게 나의 감정을 엄청나게 많이 덧칠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감정입니까. 귀찮다, 짜증난다, 말이 안 통한다, 얼굴도 쳐다보기 싫다… 이런 감정은 분노의 표현입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낄 때 일어납니다. 상대방을 제어할 수 있고 제어해야 하는데 그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분노합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내 통제 밖에 있는 존재라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려움을 느끼면 도망갑니다.

5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 사이의 노년기를 막 시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할 때 이들은 서로에 대한 분노를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거지요. 부부끼리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형제 자매끼리, 부모 자식간에, 직장동료에게도 그런 감정의 덧칠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그에게 칠한 ‘나의 감정’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오. 내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 사람에게 칠한 나의 감정입니다. 분노라는 감정, 두려움이라는 감정, 애착이라는 감정입니다. 내가 칠한 감정을 보고, 또 그 감정에 반응해서 행동합니다. 물론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떤 특정한 감정을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해서 항상 똑같은 감정, 예를 들면 분노라는 감정만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만들어낼 감정은 화가 될 수도 있고 애착이 될 수도 있고 자비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를 보면서 습관적으로 화라는 감정만 만들어내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밖의 것이 나에게 짜증을 준 게 아닙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짜증이 난다고 할 때, 날씨가 나에게 짜증이라는 감정을 준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더운 것이 원인이 되어 내가 내 안에서 짜증이라는 감정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내가 만든 감정이고 내 밖에 있는 것은 내 마음대로 통제하기 힘든 조건입니다. 내 안의 것과 내 밖의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째서 익숙한 사람일수록 대화가 적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 초코파이 선전문구에서나 그렇습니다. 왜 수십 년을 같이 산 사람일수록 말을 해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을까요? 똑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알고 있어서입니다. 의사소통이란 끊임없이 해도 통할까 말까인데 하물며 말을 안 하면 당연히 더 멀어지게 됩니다.

내가 덧씌운 색깔 걷어낼 때 대화는 시작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내가 덧씌운 감정을 분리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감정을 이 사람에게, 이 물건에게 덧칠하고 있는가를 구별하는 때부터 비로소 대화가 시작되고 인생이 지혜로워집니다. 내가 칠한 감정을 구별하지 않고 하는 대화는 억지입니다. ‘내가 참아야지, 참아야 우리 부부가 행복하지’ 하면서 속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해결법이 아닙니다. 참는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 안의 것은 나의 감정이며 내 밖의 것은 삼라만상입니다. 밖의 것이 원인을 제공한다고 해서 거기에 내 감정을 덧칠한 후에 마치 밖의 것이 그 감정을 나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안의 것과 밖의 것을 혼돈하지 않고 구별하는 지혜를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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