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
최근 증심사에 태국 스님이 와서 머물다 갔습니다. 한 달 정도 우리나라 사찰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위해 온 스님입니다. 처음 태국 스님의 기거 요청을 받았을 때는 불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불법체류 등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스님이 남의 나라에 와서 잘 데가 없어 힘들어하는데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마음 한구석은 불안했지만 오시라 하여 증심사에 계시다 갔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였을 때는 모르는 무언가가 오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경계해야 했습니다. 길고양이에 밥을 줘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 처음에는 다가오지 않고,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살금살금 다가와서 가지고 갑니다. 이것은 본능이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마음속에 항상 있기 때문에 저도 태국 스님이 온다고 했을 때 내심 불안했던 겁니다.
지구 반대편 파푸아뉴기니와 같은 오지의 원시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눈에 보이는 앞산까지가 우리 마을의 영역이고 생활권입니다. 이들 원주민은 그 영역을 넘어갈 일이 거의 없고, 넘어가면 그곳의 원주민들과 치고 박고 싸우게 됩니다. 영역을 못 지키면 죽는 것이기에 누군가 내 영역에 들어오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지켜져 온 원주민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파푸아뉴기니 공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있습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볼 수 없던 풍경입니다.
문명, 위험에 대처하는 사회적 약속
왜 그럴까요?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여기에서 해코지를 하면 경찰이 와 잡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벌금을 내고 감옥에 가는 등 제재가 주어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힘을 부여한 법이라는 것이 복잡한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도 문제가 없도록 규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시인과 다르게 모르는 사람과 섞여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명사회이고,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사회, 즉 국가라고 하는 것이 등장한 지는 인류역사에서 길어야 5, 6천 년 전입니다. 인류가 처음 등장한 것이 600만 년 전이라 하면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전 지구적인 역사를 놓고 보면 지금의 이런 고도로 복잡한 사회는 비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은 파푸아뉴기니 원주민의 삶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고, 지금처럼 온 세계가 하나인 삶은 비정상적인 삶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아주 이례적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조지프 테인터라는 학자가 쓴 <문명의 붕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의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진화해 온 수백만 년 동안 일관된 정치적 단위는 자급자족하며 독립적으로 살았던 자율적인 소규모 공동체였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위계적이고 조직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국가들은 장구한 인류사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현상으로 불과 6000천 년 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조지프 테인터 <문명의 붕괴>
여남은 사회의 불안요소를 해결하려면?
얼마 전 진주에서 조현병을 앓는 사람이 같은 동네 사람을 묻지마 살인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하지만 가만 생각하면 미국에서는 총기난사와 같은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뉴스에서는 국가가 정신질환자를 방치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 합니다. 방치한 원인으로는 국가의 관료행정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병원으로 책임을 돌리고 지자체에서는 미등록자를 관리할 수 없다고 하고 병원에서는 환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가 사회에 방치되었고 증세가 심각해져 문제를 일으킨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의 책임 방기다 하는 결론이 납니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어쨌든 사회의 불안요소는 사회로부터 격리를 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누가 판단하냐는 겁니다. 이것은 제도적으로 규정하기가 애매한 부분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램 상으로 그동안의 범죄 데이터를 분석해서 우범 시각이나 장소를 특정하여 경찰을 집중 배치해 범죄 방지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제도적 한계를 기술의 발전으로 커버해도 부작용은 있습니다. 특정 지역, 특정 시간에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오해라 할지라도 경찰에게 총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으면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넣는 것입니다. 이 때 일정 수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청와대가 반드시 답변해야 합니다. 정부로 하여금 슈퍼맨, 슈퍼히어로가 되라고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가 점점 영웅을 원하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선량하고 이기적인 개인은 영웅을 원한다
영웅은 세 가지 요소를 충족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힘이 막강해야 하고, 두 번째는 그 힘을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써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힘도 막강하고 이타심도 큰데다 지혜롭고 똑똑해야 합니다. 우리 현실에는 이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는 국가이기에 국가에 요구하는 것인데, 문제는 국가는 인격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국가는 인격이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왜 이 사회는 영웅을 원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각 개인이 스스로 나서기는 싫기 때문입니다. 나는, 개인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힘이 없으니까 내가 할 수는 없지만 평화롭게 살고 싶어.’ 라고 이기적으로 생각합니다. 무언가 이타적인 존재가 내 욕심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웅이 등장한 이면에는 우리 같은 선량한 동시에 이기적인 개인들이 있는 겁니다.
불교의 영웅, 불보살
불교에서 영웅과 가장 비슷한 존재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바로 불보살님들입니다. 그런데 영웅과 불보살님 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웅은 사회적 악을 처단, 응징하고 불보살님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제도, 교화하여 그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인도합니다.
또한 영웅은 태생 자체에서부터 막강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엄청 세거나 원더우먼처럼 소리를 엄청 잘 듣거나 하는 특출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보살은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내지는 중생의 업이 너무나 깊어서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고 단지 모를 뿐이라고 경전에서 누누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진주방화사건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앙굴리마라 이야기입니다. 앙굴리마라는 천 명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려고 했던 살인마입니다. 앙굴리마라가 999명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가는 길을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막아섰습니다. 앙굴리마라는 어머니 대신 부처님을 마지막 희생자로 삼으기로 작정하고 부처님을 잡으러 가는데 아무리 가도 따라잡지를 못합니다. 이 때 부처님이 말합니다.
“멈추어라.”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살인을 멈추라는 이야기도 될 것이고, 네 안에 치성하는 번뇌를 멈추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결국 부처님은 앙굴리마라를 제도하여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엄청나게 싫어하고 구박했지만 앙굴리마라는 참회하고 또 참회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속 시원하게 당장 내 눈앞에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입니다. 불보살이 아니라 영웅을 원합니다. 너무도 이기적인 탓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현재 우리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사회탓, 정부탓, 제도탓, 법탓을 하는데 그게 없었던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봅니다.
영웅도 불보살도 없는 세상… 대안은 공동체의 회복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삶의 양식은 비교적 원시적인 아프리카의 예를 들겠습니다. 도반 스님이 조계종에서 지은 아프리카 농업학교에 가서 지냈는데 어느 날 학교에 도둑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검거된 도둑이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경악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극히 최근까지 우리 인간이 살아온 방식입니다.
마을에서 알아서 해결합니다. 정말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고, 누군가 부모 없이 힘들게 산다고 하면 온 마을이 나서서 도와줍니다. 요즘은 그런 마을이 없습니다. 앞서 조지프 테인터가 말한 ‘자율적인 소규모 공동체’가 없는 것입니다. 마을이 없으니까 국가에 요청하는 수밖에 없는데, 국가는 법과 제도로만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마을공동체를 복원해야 합니다.
이미 무너진 공동체를 어떻게 복원해야 할까요. 저는 어느 정도의 희생과 양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내 옆집도 모릅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당연히 모릅니다. 아무도 내 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나도 타인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의 익명성에 너무 취해버리면 공동체를 복원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프라이버시는 포기해야 합니다. 희생하고 감수하고 공동체를 책임질 수 있어야 복원됩니다. 진주방화범의 경우, 예전 마을공동체였다면 그가 그런 징조를 여러 번 보였을 때 이미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방치했기에 일이 커진 것입니다.
한편 우리 개개인은 스스로 그렇기 이야기하지 않지만 이기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늘 경전에서, 법회에서 ‘우리가 부처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자’, ‘부처님의 행을 하자’고 말하지만 이타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실제 이타적으로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이 이런 참사가 더는 생기지 않을 것이며, 책임 있는 개인의 행동을 하고 이타적인 모습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