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자연재해
작년 이맘 때까지만 해도 지금쯤 되면 코로나19 상황이 좋아지겠지 생각했는데 한여름이 되어도 전세계를 장악한 코로나19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선한 가을이 왔는데도, 백신이 나와도 완전하게 종식되기는 요원해 보입니다.
코로나 자체는 바이러스에 불과하지만 코로나가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숱하게 희생된 생명체들의 원한이 코로나 안에 사무쳐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가 단순히 바이러스만 퍼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속에 내재해 있는 아집과 독선, 혐오와 비난과 같은 대립하는 감정을 퍼트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QR코드를 사용합니다. 저도 신도님들 말고 카메라를 보고 법문하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올해는 유달리 장마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장마 끝무렵에는 우리 지역을 포함한 많은 지역이 수해를 입었습니다. 이번 장마가 사실은 중국에 내내 머무르다가 잠깐 우리나라에 다녀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잠깐 수해를 입은 걸로 끝나 다행이지만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인구수 만큼의 수재민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비 피해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장마가 끝나자 태풍이 몰려왔습니다. 역대급 강력한 태풍들이 연달아 지나가 경상도와 동해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은 50도 가까이 되는 고온의 날씨가 지속되다가 산불이 나서 서울의 15배 되는 면적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렇게 큰 산불의 연기가 지구 대기권 상층부까지 올라가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미국만 문제입니까? 올해 시베리아 북극지방에서는 유례 없는 고온현상이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얼음 속에 묻혀 있던 동물 사체에서 탄저균들이 활성화되어 세균이 감염된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중심주의와 회의감
올해 지구는 어느 곳 하나 무사한 곳이 없습니다. 조금만 시계를 과거로 돌려서 생각해 봅시다. 20세기에도 우리 인류는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는 상상을많이 했습니다.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라는 암울한 미래를 많이 그렸지요. 주로 영화를 통해서 어두운 미래를 상상했는데요. 가만히 보면 대게 로봇이나AI, 안드로이드 같은 존재가 인간보다 우월해서 인간을 공격하고 지배하는 등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로봇, AI, 안드로이드 같은 것들은 모두 인간의 창조물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인간들은 인간의 멸종마저도 인간의 손에 의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우리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20세기까지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오늘의 우리는 불안감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이러다 인간이 멸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극소수의 환경주의자들만 하는 생각이었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전혀 떠올리지도 않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 할 것 없이 멸종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안 하지만 ‘이러다가 지구에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올해 들어서 다들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근원에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이 모든 것을 자초했다는 회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라 함은 이 세상을 인간과 인간 아닌 것으로만 나누는 것입니다. 동물, 공기, 바람, 풀 등 인간 아닌 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복무하는 존재, 봉사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고 때문에환경이라고, 주변이라고,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자연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울한 날의 기분전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나 혼자 지구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 같고 우울합니다. 이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의 짧은 동영상이나 보고있는 것이 제일 속 편합니다. 저도 며칠 전 기분전환 겸 유튜브를 봤는데요. 20대 후반의 방송국 PD출신의 여성이 시골 빈집을 고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콘텐츠로 보여주는 채널이 있었습니다.
마침 채널 주인공도 좀 우울한 날이었나봅니다. 콘텐츠 속 주인공이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하고, 옆집 어르신들에게 가서 투정도부리는 모습이 잔잔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막이 뜹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살아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었던가 봅니다.”
일반적인 20대 후반의 나이 또래들은 서울에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것이 당연한 세상입니다. 남들은 다 그렇게 사는데 자기는 혼자 시골에 내려와서 다쓰러져가는 집을 고쳐서 산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불안하고 회의감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소소한 방법으로 마음을 풀고 나니까‘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라는 안도감이 드는 겁니다.
직장 열심히 다니고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많이 모아서 도시에서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만이 바람직한 삶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드는 거지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 받고 싶어서 마음이 그렇게 울적했나 보다라는 문구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상하게 그 프로를 보니 울적했던 제 마음에도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젊은 피디의 모습, 그를 토닥여주는 이웃집 할머니, 시골 미장원에서 머리를 해주는 사장님과의 대화, 젊은 피디가 혼자 빈집에 앉아있는데 가만히 와서 곁을 지켜주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자니 저에게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동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이지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도해서 위로하고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지않는 연결망 속에서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잠깐 고통을 잊게 해주는 위로
그런데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젊은 나이에 시골에서 살아보는 것도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고 깊게 믿고 있기에 마음이 안정되었는가? 제가 볼 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니까 걱정되고 불안했던 마음이 잠시 사라진 것은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 때문이었습니다. 근본적인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라는 생각은 잠시 불안감이 해소된 상태인 것이지, 자기 삶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나 가치관, 철학이 생겼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아무 근거 없이 작은 화면 속 짧은 영상을 보고 위로 받은 것입니다. 그 피디가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살아가야 이 지구를 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강의를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는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고, 제 마음 속의 인류에 대한 불안감과 회의감도 올라오다가 잠시 사라졌을 뿐입니다.
기분이 좀 나아져서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들이를 나가서 커피전문점에서 파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커피전문점에 가면 일회용품을써야하니까 텀블러를 찾아서 챙겼습니다. 텀블러를 운전석 컵홀더에 내려놓는데 컵홀더에 비해 텀블러 밑둥이 작아서 고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순간, 이 텀블러에 커피를 받을까? 그냥 일회용 컵에 받을까? 그냥 커피를 마시지 말고 드라이브만 할까? 라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엄청난고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커피는 마시지 않고 귀가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라도
돌아온 후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기후위기나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상적으로 일회용품을 소비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런저런 고민을 했고 실제로 일회용품을 소비하지 않는 실천을 작게나마 했다 이겁니다. 나 참 잘했다,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기후학자나 환경학자들이 30년 안에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측하는데요. 그날에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나는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내가 일회용품을 안 쓴다고 해서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런데 실은 이게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르틴 루터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말이 스피노자의 말로 알려져 있느냐? 스피노자가 그런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상의 피조물은 신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하는 일을 신은 지켜보기만 할 뿐입니다. 신의 뜻을 따른다고 해서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벌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신은 단지 관망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의지는 곧 신의 의지라고 합니다. 왜냐? 우리들 자신이 신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서 피조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라고 합니다. 신은 우리들이 할 수 없는 것, 욕망하지 않는 것,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허락한다고 합니다. 나의 의지가곧 신의 의지라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입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것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것이 숙명 혹은 필연이라고 봅시다. 그렇다면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신의 뜻, 신의 표현이라고 할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것 역시 신의 뜻이요 나의 의지라 이겁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신의 뜻이고 내가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것도 신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모든 신의 섭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이런 겁니다. 인간들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에게 복종하거나 거부하는 관계라고 인간과 신을 대립관계에 놓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렇지 보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곧 자연의 섭리이며 인도철학으로 이야기하면 브라흐만입니다.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의지가 곧 자연의 섭리입니다. 고로 내가 오늘 일회용품을 쓰지 않겠다고 나름대로 의지를 다지고 뜻을 굳히는 것도 신의 뜻이요, 코로나가 창궐하고 기후변화가 극심한 것도 신의 뜻입니다. 다만 내가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곧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2020년, 인간들의 미래가 너무나 암울하다는 생각을 누구나 합니다만, 지금 이 순간,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으면 합니다. 내가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가될지 모르는 암울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의지이고, 자연의 섭리이고, 만약 신이 있다면 그것이신의 뜻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