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법(法)’, 두 가지 의미
사람은 예와 지금이 있지만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있지만 법은 성하고 쇠함이 없느니라. 비록 부처님께서 계실 때 태어나더라도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며 비록 말세를 만나더라도 가르침을 받들어 열심히 수행한다면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진 의사와 같아 병을 알고 약을 주지만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며, 또 훌륭한 길잡이와 같아 바른 길로 사람을 인도하지만, 길을 따르고 안 따르는 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니라.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법이 모두 갖춰졌으니 내가 오래 산다고 하여도 더할 것이 없느니라. 이후로도 나의 제자들이 차례차례로 이어 받들어 행한다면 여래의 법신은 항상 머물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으니, 이런 이치를 안다면 자신이 도를 닦지 않는 것을 한탄할지언정 어찌 말세에 태어난 것을 근심하리오.
간절히 바라노니 그대는 모름지기 굳은 뜻을 세우고 특별한 생각을 내어 모든 인연을 버리고 뒤바뀐 생각을 없애 참으로 생사대사를 위하여 조사의 화두를 잘 참구하여 크게 깨닫기를 서원하고 절대로 물러서지 말지니라.
사람 사는 세상은 옛과 지금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과 그 전의 고려시대 사람과 지금 현대에 사는 사람이 다릅니다. 그런데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와 공의 전리이고, 또한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흔히 쓰는 ‘제법(諸法)’은 모든 법이라는 뜻이지요.
왜 법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일까요? 둘 중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 뜻일까요? 이것을 알아야 오늘 이야기하는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첫 번째,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의 진리, 연기의 진리,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야기한 법칙입니다. 그런데 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또 법이라고 하나요? 존재하고 느끼는 모든 것은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진리입니다. 법칙에 적용되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진리,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봅시다. 모든 것은 끌어당기는 힘 즉 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만유인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지구가 매일매일 자전을 하는데도 우리가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습니다. 우리도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다만 지구에 비해서 덩치가 너무 작기 때문에 잘 못 느낄 뿐이지요.
우리들 사이사이에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끌어당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의도해서 나에게 만유인력이라는 힘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만유인력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그냥 있는 것입니다. 돌멩이에도 있고 나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있는 것이 토를 달 수 없는 법칙입니다. 그런 걸 법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끌어당깁니까? 그건 우리의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부분입니다.
부처님도 이러한 법칙을 발견한 것입니다. 연기의 진리는 부처님이 생각하고 고민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발견했습니다. 마치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존재하며,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법이라고 합니다. 연기의 법칙을 벗어난 존재는 없다는 것이 100%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그러니까 법이라는 것은 멀고 가깝고 크고 작다는 분별을 넘어 모든 것에 다 있습니다. 예전이나 전이나 변함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500년 전, 1000년 전 사람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것이 중생의 세계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시간과 공간, 흥과 쇠의 분별 없는 절대 진리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있지만 도는 성하고 쇠함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가 바로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 곧 법입니다. 연기의 진리와 공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의 진리가 500년 전 조선시대에는 적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와서는 한반도에 적용이 안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하고 쇠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러한 법을 확실하게 안다면 사람도 법과 똑같이 멀고 가까움이 없고 성하고 쇠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깨닫는 것이고 영원한 행복을 증득하는 것이고 불로장생하는 것입니다. 이 몸이 천년만년 사는 것이 불로장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면 그것이 바로 불로장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깨달음을 얻으면 시간적, 공간적 제약과 어리석음과 지혜와 같은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연기의 진리입니다. 흔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상의상관의 법칙은 연기의 일부일 뿐 연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일반인들이 불교 하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단어가 ‘인연’입니다. 스님들도 인연법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이야기하지요. 인과 연이 작용하여 그 화합에 따라서 각각의 존재들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더라는 것이 인연화합의 법칙입니다. 이 중 연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벼가 쌀이 되고 쌀이 밥이 되고 밥이 죽이 된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아무리 벼를 쳐다보고 있어도 벼가 쌀이 되지는 않습니다. 벼가 쌀이 되기 위해서는 탈곡기에 넣고 돌려야 합니다. 탈곡기도 있고 사람도 있고 탈곡기를 돌릴 기름도 있고 돈도 있고 다 있는데 벼가 없다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탈곡기에서 쌀이 나올 수가 없지요. 쌀이 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벼가 있어야 한다는 것. 무언가가 있어야 변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연입니다.
연기법, 인연화합-인과업보-상의상관
그런데 이것이 자기 혼자 가만히 있어서는 변화할 수 없습니다. 뭔가 행위가 들어가야 합니다. 탈곡기를 돌린다던가 열을 가한다던가 하는 액션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입니다. 인과 연이 있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벼가 쌀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쌀이 밥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물을 붓고 밥통에 열을 가해야 합니다. 밥에 물을 넣고 계속 끓여내면 죽이 되기도 하고요. 이처럼 인과 연이 끊임없이 변한다고 하는 것이 인연화합의 법칙입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 중 다른 하나는 업보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단 두 가지로만 나눈다고 하면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입니다. 주체와 객체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이것이 연기법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업보의 법칙입니다.
업보란 무엇입니까? 주체가 무언가를 하면[業:업] 반드시 흔적이 생긴다[報: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 세계에 흔적을 남깁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면 대상에 변화를 줍니다. 그것이 인과업보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법칙으로 움직이고 그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서로 어떻게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나와 나 아닌 것은 또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이 세 가지는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과업보의 법칙, 인연화합의 법칙, 상의상관의 법칙. 이 세 가지를 연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이지요.
그래서 법은 멀고 가까운 것이 없고 흥하고 쇠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불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하면 어딘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도 아닙니다. 이렇듯 부처님이 발견한 법은 이러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깨달음, 받는 것이 아니라 이루는 것
우리가 만약에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 태어나더라도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시대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더욱 극단적으로는 내가 부처님의 이웃집에 산다 한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말세를 만나더라도 가르침을 받들어 열심히 수행한다면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말세란 좋은 시절을 다 지나보낸 때입니다. 부처님도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요. 비록 깨달음과 먼 조건에 있어도 열심히 수행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조건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열심히 수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힘을 더하는 이야기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덧붙입니다. 먼저 의사의 예를 들지요. 내가 어떤 명의를 알고 있어서 그 의사가 나에게 딱 맞는 진단을 하고 처방을 주어도 내가 그 약을 먹지 않는다면 병이 낫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약은 먹지 않고 술 마시고 놀다가 죽었다고 할 때, 이 사람의 죽음은 의사의 잘못이 아니라 올바른 처방과 그에 따른 약을 따르지 않은 때문입니다.
길잡이의 예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길잡이가 옳은 길을 일러주었다 한들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간다면 길잡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을 전지전능한 신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에 100% 맞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의사이고 안내자일 뿐이라고 합니다.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의 일이지 부처님의 일이 아닙니다. 제시한 길을 따라가고 따라가지 않는 것은 상대에게 달린 일이지 부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불교에서는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자력신앙은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을 수 있는 모든 가이드를 제시하지만 깨닫는 행위만은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타력신앙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부처님께 의지하여 발전시키겠다는 다짐입니다.
부처님이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속세의 업이 너무나 커서 실천하지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나와 현실의 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 가서 통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자란 부분을 경책해주시고 게으르면 따끔하게 꾸짖어달라고 하는 것이 타력신앙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 부족함을 부처님에게 의지하여 발전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법당에서 부처님께 기도하고 절하고 발원하는 속에서 나도 부처님처럼 열심히 수행하여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자력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타력신앙이라고 배척할 것도 아니고 자력신앙이라고 으스댈 것도 아닙니다. 자력신앙의 폐단은 아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행이 올바르다는 맹신에 빠져서 스스로 점검하지 않습니다. 타력신앙도 마치 부모에게 울고 떼쓰는 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 부처님에게 의지하여 원하기만 한다면 결코 올바른 방향이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은 없어도 부처님이 발견한 법은 없지 않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법이 모두 갖춰졌으니 부처님이 오래 산다고 하여도 더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법의 속성 중 하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입니다.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상의상관,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으므로 내가 무언가를 하면 다른 어떤 존재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당연히 나에게 이롭고 남에게 이로운 것은 당연히 나에게도 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니 짧은 식견, 이기적인 소견으로 ‘나만 이롭겠다’고 하는 것은 길게 보면 나에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로운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법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이 희로애욕과 애오욕,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법칙에 따라 순응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습니다. 자리이타의 법을 이 세계는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법은 그냥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법이 존재하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부처님도 단지 발견했을 뿐이지요. 그러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본인이 오래 산다고 해도 법이 더욱 깊어지거나 심오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후로도 나의 제자들이 차례차례로 이어 받들어 행한다면 여래의 법신은 항상 머물러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마무리 합니다. 여기에서 법신을 앞에서 설명한 법과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자신이 도를 닦지 않은 것을 한탄할지언정 어찌 말세에 태어난 것을 근심하리오. 간절히 바라노니 그대는 모름지기 굳은 뜻을 세우고 특별한 생각을 내어 모든 인연을 버리고 뒤바뀐 생각을 없애 참으로 생사대사를 위하여 조사의 화두를 잘 참구하여 크게 깨닫기를 서원하고 절대로 물러서지 말지니라.
반야심경에 전도몽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뒤바뀐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없는 것을 우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나’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없는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연기, 진리, 법과 같은 것이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세계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도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없애고, 중생의 번뇌심을 버리지 못하고 헤매게 만드는 헛된 인연을 버려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안에 대한 믿음과 의심으로 완성되는 깨달음
이렇게 수행하며 절대로 물러나지 말라는 당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조사의 공안 상에서 참구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공안은 공신력이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하고 무조건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화두의 다른 말이 공안입니다. 화두참선을 할 때 공안을 가지고 공안에 대한 의심을 끊지 않고 이어갈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화두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안입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은 모든 존재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스승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내렸습니다. 이 화두, 공안은 완전히 공증한 말입니다. 믿어야만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스승은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의심이 됩니다. 그 의심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화두참선입니다. 그런데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는 공안을 들고, 의심이 없이, ‘아 개는 불성이 없나보다.’ 하고 만다면 화두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의심이 핵심입니다. 의심하려면 공안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심이 이어지고 그래야 화두가 성성해지고 그래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큰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아 절대로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지 말고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법칙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으라는 것은,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 행동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법칙이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일거수일투족 깨달음을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 합니다.
깨닫겠다는 원을 크게 세운다는 것은 잠깐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활 하나하나에 깨달음이라는 원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비장한 각오를 다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하게 다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 수행이고 매 순간 자기를 성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매일 깨닫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나를 성찰하는 것을 내 삶의 법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찰이라는 것은 복잡하고 심오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주 단순합니다. 걸음을 걸을 때 왼 발이 앞으로 가는지 오른 발이 앞으로 가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 눈길을 어디로 주고 있는지, 왼쪽 무릎이 아픈지 오른쪽 무릎이 아픈지. 내 마음이 슬픈지 짜증이 나는지.
지금 이 순간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성찰이며 수행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초지일관 바라보는 것이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