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예수재는 참회하고 공덕짓는 날
윤4월 생전예수재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입재 때도 말씀드렸지만 생전예수재는 참회하고 공덕을 짓는 날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났지만 다음 생에도 사람으로 태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공덕을 지어 업장을 소멸하는 수행을 할 수 있겠지만, 만일 소나 말이나 닭, 그리고 들판에 외롭게 핀 잡초로 태어난다면 악업을 지어도 그것을 소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기왕 지금 사람 몸을 받았을 때 이생에 모든 업장을 소멸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생전예수재를 지내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의 바다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고 번뇌에 가득 차있으니 어떻게 하면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을까, 궁리하는 다양한 시도 중 하나로 생전예수재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신호다
왜 우리 중생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데 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일종의 신호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빨간불이면 차를 세우고 파란불이면 직진하듯이 신호는 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 우울하다, 두렵다, 불안하다, 짜증이 난다 등의 감정과 생각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무언가를 하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얼마 전 차담을 하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간호사로 일을 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을 그만둔 사람이었는데요. 그동안 모은 돈으로 보건직 공무원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사표를 던졌지만, 그만 둔 다음날부터 불안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계획은 가지고 있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이죠.
그런데 관점을 바꾸어서 생각해봅시다. 만일 이 사람이 직장을 그만 둔 다음에도 마음으로부터, 정말로 진솔하게 아무런 걱정과 불안, 고민이 없다면 이 사람은 보건직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무언가 불안한 감정이 있다면 마지못해서라도 책을 펼치고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으면 공부를 해야 하는 절박함도 없습니다. 절박함이 없으면 시험에서 떨어지지요. 시험에 떨어지면 주변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그러니 불안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혹은 공부하는 게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불안해서 공부를 합니다. 고통은 신호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안한 감정을 주는 것입니다.
신호를 연구하면 해결책이 보인다
한 걸음 나아가서 생각해봅시다. 누군가 괴롭고 불안한 감정을 느꼈을 때, 올바른 해결책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마시고 고민을 털어놓고 오늘만은 다 잊고 놀자고 해버린다면 그 불안한 감정을 일시적으로 잊었을지언정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음 날이 되면 불안한 마음이 또 신호를 보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신호에 또 다른 불안을 잊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고통이라는 신호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스님, 저는 화를 내고 싶은데 화가 안 나요. 부당한 상황에서 화를 내고 내 입장을 강변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신호등이 고장나버린 경우입니다. 괴롭다, 화가 난다, 짜증난다는 고통의 신호를 보내야 하는데 신호등이 고장 나서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원인이 되는 문제는 계속 쌓여가니 언젠가는 뻥 터져서 대형사고가 날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이라는 상황을 무시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도대체 고통의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를 하고, 어떤 기간에는 학원에 등록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등 계획이 바로 서있는데 왜 불안한 것일까요?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나의 합리적인 이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호는 우리 안의 철부지 중생이 보낸다
우리 안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신호를 보냅니다. 이 어린아이를 부처님은 중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안의 중생이 보내는 신호를 우리는 고통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인생은 괴로운 것이 당연합니다. 괴로워야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앞으로의 삶이 이전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됩니다. 우리가 절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 삶에 나타나는 고통과 불안안함을 어떻게 해서든 없애보겠다는 나름의 노력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고통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지, 고통을 회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고통의 원인을 해결했을 때 오는 것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언제나 행복한 영원한 행복의 길입니다. 부처님이 제시한 길은 과연 고통이 없는 길인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욕계에서 행복은 고통이라는 신호를 받고 그 신호의 원인을 찾아서 그에 합당한 행동을 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과도 같습니다. 그 보상이 우리가 느끼는 행복한 마음, 기쁨, 즐거움, 성취 등입니다. 그러니까 행복감을 술이나 약이나 돈, 권력으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의 원인을 해결했을 때 가지는 행복이 바로 고통의 보상으로써의 행복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행복의 길은 고통과 행복의 범주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나밖에 모르는 우리 안의 철부지 어린아이를 부처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애당초 고통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길입니다.
이번 생전예수재를 보내며 고통이 당연하다는 것, 고통을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중생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