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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입문 방법
오늘은 31쪽 <2. 공부의 입문 방법>으로 시작합니다. 32쪽부터 38쪽에 걸쳐 전개되는 ‘도를 깨치는 선결조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참선요지>에서는 참선의 목적이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참선의 선결 조건이고 성품을 보는 것은 참선의 목적입니다. 참선의 선결 조건은 17쪽에 마음을 밝히는 것과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것은 도를 깨치는 선결조건을 획득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으로써 첫 번째가 인과를 깊이 믿을 것, 두 번째는 계율을 엄히 지킬 것, 세 번째가 신심을 굳게 지닐 것, 네 번째가 수행의 문을 정할 것 등 네 가지가 나옵니다. 이 네 가지를 잘 행하면 참선의 선결조건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밝히는 것이고 망상을 제거하는 법입니다.
1. 인과를 깊이 믿을 것(32p)
만약 인과를 믿지 않고 함부로 마구 행동하면 도를 깨치지 못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에게 삼도의 고통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문장의 구조가 ‘~하면 ~한다’로 이뤄졌습니다. ‘~하면’이 뒤에 오는 ‘~한다’의 조건입니다. 뒤가 ‘도를 깨친다’입니다. 도를 깨치는 것의 선결 조건은 ‘인과를 믿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지 않으면 도를 깨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왜 인과를 믿지 않으면 도를 깨치지 못하는가? 입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말일까요? 우리가 흔히 원은 직접적인 인이고 인은 간접적인 인이며, 인과에서 인은 원인이고 과는 결과라고 합니다. 인과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고 들어가는 것이 있으면 나오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이고 인연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겠다 혹은 받기만 하고 주지 않겠다고 의도하거나 원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들어오기만 하고 내보내지는 않겠다고 의도하거나 원한다면, 그렇게 내 뜻대로 무언가를 하고 자 한다면 인과의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인과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는 것, ‘내 뜻’을 내세우지 않는 것
인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뜻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인과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흔히 좋은 인이 있으면 좋은 과보가 있고 나쁜 인이 있으며 나쁜 과보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나가는 것이 있다는 부분이지, 좋다 나쁘다 착하나 나쁘다라는 형용사 부분이 아닙니다. 인과의 질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인과의 법칙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는 맹점이 있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소홀하기 쉽지만, 질이나 양보다는 인과의 법칙 그 자체를 깊이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인과에 의해 흘러가는 세계가 아니라 ‘나’를 내세우면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깨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인과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고 인과 연에 의해서 세계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받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망상입니다.
참선의 선결조건인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인연을 믿는 것, 인과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세상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놓는 것입니다. 그 생각만 내리면 세상은 당연히 인연에 의해 흘러갑니다.
또한 우리가 인과의 양과 질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과의 법칙이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백한 진리를 자칫 놓치기 쉽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과의 질이란 좋은 인연 나쁜 인연이라는 선악을 정해놓은 것이며, 인과의 양이란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좋은 과보를 많이 받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나쁜 과보를 크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과를 믿는다는 그 자체입니다.
인과를 믿는 것, 연기실상의 세계를 확신하는 것
이어서 허운스님이 두 가지 예를 듭니다. 첫 번째는 유리왕이 석가족을 멸망시킨 고사이고, 두 번째는 인과불낙과 인과불매의 고사를 들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고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부처님도 인과의 법칙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전생에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때린 과보에 따라 삼일간 두통을 앓았다는 고사가 나오고요. 아무리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족일지라도 나쁜 인을 지었기에 멸망되는 과보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의도하는 대로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생각을 버리고 연기실상의 법칙을 믿는 것입니다. 연기실상의 세계를 확신하는 것이 인과를 믿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관련된 것이 백장스님과 여우의 이야기입니다. 34쪽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스님이 인과를 묻는 질문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인과불낙]’고 대답을 했다가 잘못된 가르침을 준 과보로 다음 생에 여우의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질문한 사람이 백장스님에게 다시 물으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다[인과불매]’고 대답해 여우로 환생한 수행자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과불낙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인과와 나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인과에 지배받지 않으며,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인과불매는 인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알고 인과에 의해서 행동하고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과불매의 고사는 석가족이 멸망한 고사와 일맥상통합니다. 유리왕은 석가족을 정벌하기 위해 세 번 출정합니다. 세 번 모두 출정하는 길목에 부처님이 말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립니다. 유리왕 자신도 불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출정에는 부처님도 “정해진 인연을 어쩔 수 없다”하며 유리왕의 출정을 더 막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인연실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그에 따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나는 인연과 무관하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34쪽 중간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불낙인과]는 잘못된 것이고 인과에 어둡지 않다[불매인과]라고 해야 깨달음을 얻는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연기실상의 세계가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고 이 세계가 연기실상의 인연의 법칙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위한 선결조건을 획득하는 방법은 다름 아니라 인과를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는다 함은 내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하는 생각을 놓고 인과 연의 법칙에 따라 연기실상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를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2. 계율을 엄히 지킬 것(35p)
계로 인하여 비로소 정이 생길 수 있고 정으로 인하여 비로소 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계정혜 세 가지가 어떤 관계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순차적인 관계로 나옵니다. 계를 지켜야 선정이 생기고 선정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지혜가 생깁니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삼매에 들 수 없고 삼매에 들지 못하면 지혜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의 단계를 넘어가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계정혜는 순차적인 단계, 앞의 단계를 완료해야 뒷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관계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오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정은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삼매에 든다는 말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것은 마음이 바깥의 경계에 자극을 받아 출렁거리지 않는 것입니다. 잡생각과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세 번째,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성품을 보는 것이 참선의 목적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선결조건은 마음을 밝히는 것인데, 그것의 다른 표현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잔잔해서 모든 것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만약 호수에 바람이 불어서 수면이 일렁거리고 파도가 치면 호수 주변에 아무리 멋진 경치가 있어도 호수에 비치지 못합니다. 호수가 거울처럼 조용해야 내 얼굴도, 주변의 모든 것도 비춰보입니다. 즉 지혜가 열리는 것입니다. 지혜가 열리기 위해서는 선정에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망상이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계정혜는 단계별로 발전, 후에는 상호보완
여기에서는 계정혜가 단계별로 표현됩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계를 지키고, 어느 정도 계를 지킨 후에는 그 바탕에서 선정의 힘이 생기고, 어느 정도 마음이 고요해지면 흐릿하나마 지혜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집중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선은 이 순서로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고 나서는 상호보완하는 관계가 됩니다. 계를 지킴으로써 선정을 얻을 수 있고, 선정이 깊어짐으로써 지혜가 밝아질 뿐 아니라 더욱 더 망상이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니까 계를 어길 일이 줄어들고, 계를 더 철저하게 지키니까 선정이 더 깊어지고, 마음이 더 고요해지니까 지혜가 더욱 열리고, 지혜의 힘으로 마음이 더욱 더 고요해져 망상이 일어날 여지를 주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다보니 지혜의 힘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상호 보완의 관계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는 계정혜의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수행이라는 것은 결국 망상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지혜를 보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각종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지루해하고 심심해하고 우울해하고 화내는 것이 망상입니다. 그런 망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마음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금부터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부처님 당시부터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마음먹는다고 되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 힘든 것입니다. 깨달음이 힘든 것이고요.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수심이라 하지 않고 수행이라 합니다. 왜냐? 마음을 다스리려면 먼저 행동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소한 행동, 말투, 언어 습관, 몸짓, 발짓, 대화의 패턴, 습관적인 반응과 같은 행동을 다스려야만 마음을 본격적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행동을 다스리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태풍이 부는 가운데 내가 탄 배가 출렁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에 있는 배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바다가 고요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비바람이나 태풍이 불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식으로 마음을 다스리려면 행동을 다스려야 합니다. 행동을 다스린다는 것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습관과 행동들, 신구의 세 가지로 짓는 행동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마음을 밝힐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다스리는 지계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지계를 바탕으로 마음을 본격적으로 고요하게 하는 선정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나 위빠사나, 간화선, 화두 참선 같은 수행을 통해서 성품을 봅니다. 다시 말해 지혜를 얻습니다. <참선요지>는 책 서두에 나오는 첫 문장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립니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데에 있다.’ 마음을 밝힌다는 말은 계정혜에서 계와 정에 해당하고, 성품을 본다는 말은 혜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계정혜는 단계적으로 시작하되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가면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갑니다.
마음이 평등하고 행이 곧으면…
왜 계율을 지켜야 하는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행동을 다스려야 합니다. 36쪽 네 번째 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육조스님이 마음이 평등하면 애써 계를 지킬 것이 어디 있고 행이 곧으면 참선은 해서 무엇 하겠는가 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마음이 평등하다(조건)면 계를 지킬 필요가 없고, 행동이 곧다면 참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하므로 애써 계를 지키는 것이고, 행동이 곧지 못하니까 애써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등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마음에 호불호, 편견, 차별,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세계,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은 세계가 깨달음의 세계이며 그런 세계는 평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말하는 평등은 보통 경제적인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등은 그런 좁은 의미의 평등이 아니라 분별과 집착이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평등하다는 말은 이미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이미 깨달았으니까, 즉 지혜가 열렸으니까 굳이 계를 지키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이 계를 지키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해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행이 곧다는 말은 언과 행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좋으면서 싫은 척 하는 것, 싫은데 좋은 척 하는 것은 행동이 곧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은 마음을 다스려서 행동을 다스릴 수 있고, 행동을 다스려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지계와 선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단계라면 굳이 의도적으로 참선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참선을 한다는 말은 항상 마음에 망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하므로 매 찰나 일어났다 사라지는 망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고요해서 참선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그냥 참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다릅니다. 깨달았으므로 막행막식하고 오만 데에 관심이 오가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행동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망상에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정혜는 처음에는 순차적인 관계이다가 후에는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다는 말씀을 거듭 드리고 있습니다.
3. 신심을 굳게 지닐 것
믿음은 도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신심이 없으면 잘 할 수 없습니다.
아함경에 나오는 ‘신의도원공덕모’라는 말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신심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굳이 정의내리자면 삶의 원동력입니다. 내가 무언가 행동을 하게 하는 힘이고 에너지입니다. 만약 내가 차를 가지고 광주에서 서울에 간다고 할 때, 차에 연료가 없으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신심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차로 광주에서 서울에 갈 때 꼭 필요한 원동력, 기름을 말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머지않은 미래에 있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루어내는 것이 행동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한 것만 생각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점심에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지금 내 앞에는 자장면이 없습니다. 점심에 자장면을 먹기 위해서는 지금 무언가를 해야햅니다. 전화를 하든지 중국집까지 걸어가든지 뭔가를 해야만 지금 내 앞에 없는 자장면이 머지 않은 미래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장면을 시키면 20분 뒤에 자장면이 온다는 믿음이 있어야 전화를 거는 행동을 합니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자장면이 올까?’ 하는 의심이 있으면 행동을 하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이 길로 가면 정상이 나올까?’ 하는 의심이 있으면 등산을 하는 데에 힘이 붙지 않습니다. 이 길을 가고자 하는 믿음, 길을 오르면 정상이 나온다는 믿음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등산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
이전에 자장면을 시켜 먹은 기억이 있다면 의심이 줄어듭니다. 또한 옆의 친구가 자장면을 시켜 먹어봤다고 이야기해주면 믿음직스럽습니다. 그 친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공신력이 있는 친구라면 믿음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더욱이 그 친구가 부처님 같은 존재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주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에서 만드는 것인데 내 주위에서 그런 상황들을 조성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일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믿음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원동력입니다. 도구 내지는 수단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미신이나 과신이 됩니다. 원래 믿음을 필요로 했던 목적을 잊어버리거나, 믿음이 너무 강하다보니 목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맹신은 믿음이 너무 커서 믿음의 목적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맹신은 믿음을 있게 한 목적을 믿음 때문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미신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정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 가는 것, 잘못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신은 제대로 믿고 있는가에 대한 검토 없이 그냥 무턱대고 믿는 것입니다. 내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결정이 틀린 건이 없으므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입니다. 도구로써의 믿음을 망각했을 경우에 맹신, 미신, 과신 같은 잘못된 믿음이 나옵니다.
특히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도구이며 조건이고 원동력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한 원동력입니까? 깨달음을 얻기 위한 원동력입니다. 믿음 그 자체가 신행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심을 굳게 지녀야 하는 이유는 무슨 일을 하든 믿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머지 않은 미래에 만들어 내는 것이 행동이며, 행동을 하게 하는 원동력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특히 그 목적이 깨달음이라면 그 믿음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안 가본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갈 수 없습니다.
4. 수행의 문을 정할 것
이것은 다양한 수행방법 중에 한 가지를 골라서 진득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참선, 염불, 사경 등 한 가지를 골라서 진득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참선 외에 다른 방법은 다 하열한 방법이고 참선이 최고입니까? 혹은 기도가 최고이고 다른 방법은 그다지 효력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38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채 오늘은 이 선지식이 “염불이 좋다”는 말을 듣고 한 이틀 염불을 해보다가 내일은 다른 선지식이 “참선이 좋다” 하는 말을 듣고는 한 이틀 참선을 한다.
허운스님이 한 가지를 꾸준하게 하라고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것이 좋다고 하니까 잠깐 이것을 하다가, 한 이틀 해보니까 눈에 드러나는 효과가 없어서 다른 쪽에 가서 다른 것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요. 자전거 타는 것에 비유를 들면, 자전거를 처음 탈 때는 어마어마하게 힘이 듭니다. 1~2미터 가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조금 가다가 넘어지더라도 자전거 타는 것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자전가 타는 법이 몸이 익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수행이 되었든 처음에는 조금 힘들다고 다른 수행을 하고 조금 해보다가 그만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수행이 익숙해지면 필요에 따라 인연이 닿는 대로 다른 수행을 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와 더 맞는 수행을 조금 더 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꾸준히 진득하게 수행하라는 말입니다.
입문, 일단 문에 들어서면 꾸준해야 합니다. 문에 들어선 후에는 사경, 예불, 독송, 염불, 참선 등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공간에서 여러 가지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에 들기 전에는 일단 하나의 수행을 꾸준히 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인데, 마음을 밝히는 것은 참선의 선결조건이고 성품을 보는 것은 참선의 목적입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참선의 선결조건을 획득하는 방법, 달리 말해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에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 인과를 깊이 믿을 것 2. 계율을 지킬 것 3. 신심을 굳게 지킬 것 4. 수행의 문을 정할 것. 이것들을 꾸준히 익히면 망상을 제거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