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이해 1

각묵스님의 <초기불교 이해>로 알아보는 불교의 원형.
부처님 당대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초기불교는 다양화된 한국불교의 원형을 알 수 있게 하고, 대승 중심의 한문 경전이 익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시사점을 제시하기에 중요하다.
초기불교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초기불교는 명칭과 개념을 해체한다. 개념의 해체를 통해 연기실상을 통찰할 때 존재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떨어지며, 그랬을 때 연발이 실현된다.
‘어떻게 하면 궁극적인 행복으로 갈 수 있는가?’에 불교는 대답을 제시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보시, 지계, 수행이 궁극적인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며, 세 가지 영역이 모두 잘 이루어질 때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증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각묵스님, 경전, 교학, 인도불교, 초기불교

https://www.youtube.com/watch?v=HOzIUZbBWVk&list=PLoHDOofmKm4PZpa-QKP_MQMMC7o8oCWM0&index=1

오늘부터 8회에 걸쳐 각묵스님의 <초기불교 이해>(초기불전연구원)로 온라인 일요강좌를 진행합니다. 책 선정 과정은 메신저를 통해서 상세하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아직 저도 이 책을 정독한 바 없어 같이 공부를 하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목차를 보면 전체 구성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파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1편 ‘초기불교의 기본주제’는 입문으로 볼 수 있을 거고요. 제2편은 ‘초기불교의 교학’, 제3편은 ‘초기불교의 수행’, 제4편은 ‘초기불교의 주요 술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불교의 원류, 초기불교 

  초기불교에 관련한 다양한 서적들이 근 10년 동안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방불교에서 전승되어오는 교리와 수행을 가장 남방불교 전통에 입각해서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시는 분이 각묵스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각묵스님의 또 다른 저서로는 <니까야 강독> 시리즈, <아비담마 길라잡이>, <금강경 역해>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여러 가지 불교가 뒤섞여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불교’라고 말하는 것의 원류, 원형, 핵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고 변형되고 새롭게 확장되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 입문을 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여러분께서 조금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수행해야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초기불교를 한 번쯤은 정확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남방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교리 해설에 대해 전세계 불교학계가 100% 공감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이 부처님 당시의 원음과 당시 불교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데에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제1편 ‘초기불교의 기본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제1장 ‘들어가는 말’은 저자가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이 책의 특징, 이 책의 줄거리 등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책이든 마찬가지로 들어가는 말을 잘 보면 책의 전반적인 흐름과 핵심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2장은 ‘초기불교의 기본 주제 – 행복의 추구’입니다. 불교의 기본 주제가 행복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오늘 공부할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는 말(15p)

어떤 공부를 하든 전체 중에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왜 ‘초기불교’라는 용어를 쓰는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어디까지를 초기불교라고 하는가 즉 초기불교의 기준을 정립합니다. 세 번째로 초기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짚어내면서 제1장을 마무리합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6쪽 두 번째 단락에 아주 의미심장한 문장이 있습니다. 

  • 마스타니 후미오 박사 같은 금세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일본에 불교가 두 번 전래되었다고 강조한다. 한 번은 중국과 한국을 통한 한문불교의 전래였고 또 한 번은 근세에 빠알리와 산스끄리뜨를 통한 범어불교 특히 초기불교의 전래라고 그들은 말한다. 

한문 중심 불교문화서 초기불교를 본다는 것 

이것은 한국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한문으로 쓰여진 한문경전을 공부하는 것으로 불교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한문으로 쓰인 대승경전으로 처음 불교를 접했다는 말입니다. 아함경이나 니까야와 같은 서구의 불교연구 성과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초기불교에 대한 내용도 함께 들어온 것입니다. 

초기에는 일본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내용이 유입되다가 나중에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직접 서양에 나가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물로 서구의 초기불교 연구 성과들이 직접 유입되게 됩니다. 

기존에 대승불교만 알고 있던 상황에서 새롭게 서구를 통해서 초기불교가 들어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0세기 이전에 북동아시아 쪽에서는 한문경전을 통한 대승경전밖에 접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면,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다양한 모습들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불교가 거의 새로운 모습으로 전래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존의 대승불교만 중시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의 불교 즉 남방불교, 티벳불교,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행하는 명상의 흐름 등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한문에 기반한 대승불교에만 불교의 틀을 국한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초기불교, 남방불교서 전승되고 있는 빠알리 3장

초기불교의 대상이 무엇이냐?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현재 남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빠알리 3장입니다.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결국 한 마디로 정리하면 ‘부처님과 직계 제자들의 가르침’, 혹은 ‘3차 결집이 완료된 시점의 경전과 율장들’, ‘현재 남방에 전승되어오는 가르침’입니다. 그 이야기가 20~21쪽에 전개됩니다. 

초기불교를 처음 접할 때 어려운 점 중 하나가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 등 용어의 생소함 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용어가 큰 장벽으로 작용하지만 인내하면서 꾸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초기의 용어를 잘 모릅니다만, 초기불교 책들에 나오는 용어에 대해서 지레 겁먹고 너무 낯설어 하지 말자는 당부를 드립니다. 

24~24쪽에 걸쳐 ‘왜 초기불교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기불교는 불교의 원류이고 부처님의 육성입니다. 때문에 초기불교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지금 우리나라처럼 대승불교권에 있는 나라들은 대승불교의 근간에 초기불교가 깔려 있기 때문에, 대승사상을 이해하려면 초기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기불교, 수학적이고 분석적인 방법론

  • 현대과학의 방법론이 수학이듯이 주석서의 방법론은 아비담마이다. 둘 다 분석적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방법론이다.

초기불교는 철저하게 분석적으로, 수학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초기불교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찰나’는 75분의 1초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인도라는 나라의 특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은 사실 기존에 나왔던 초기불교 관련 서적에서는 접하지 못한 주장인데요. 각묵스님 같은 경우는 당신이 직접 니까야를 번역하는 불사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니까야에 대한 풍부한 이해 속에서 나온 주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불교와 같이 간화선이나 조사선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불교문화권에서는 분석적 사고, 수학적 사고에 바탕해 불교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특히나 불교를 풍부하고 새롭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게송, 화두, 조사어록으로 불교에 접근했다면 철저하게 분석적인 방법으로 불교에 접근해보는 것도 아주 신선하고, 다른 각도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이 초기불교를 공부를 꼭 한 번 해보기를 권합니다. 

초기불교의 핵심 – 해체해서 보기 (26p)

  • 초기불교의 핵심을 단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며 시작(詩作)에 능했던 왕기사 존자는 (…)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핵심이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는 말은 나누어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26쪽 중간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 이런 상좌부 불교를 일본학자들은 분별상좌부라 부른다. 분별이란 말이 사량분별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우리의 어감으로는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아서 저자는 해체나 분석이라고 옮긴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흔히 쓰는 분별이라는 말에 익숙해진 때문에 부처님이 분석적이고 분별했다고 하는 초기불교의 개념이 헷갈리기 쉽습니다. 저 역시도 초기불교 서적을 자주 접하지 않는 가운데 각묵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통해서 이 같은 측면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지요.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새로운 이야기이기에 굳이 각묵스님의 책으로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부하려면 게을러서 잘 안 봐지니까요. 같이 공부하는 온라인 일요강좌 여러분들 덕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 개념을 해체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분석하고 어떻게 해체하는 것일까요?

  • 물론 이러한 분석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의 해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강조하신다. (26p)

이것이 초기불교의 핵심입니다. 무엇을 해체하느냐? 개념을 해체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불교에 무슨 이런 내용이 있나?’ 의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보면 수긍이 갈 것입니다. 

<금강경>은 반야부의 대표적인 경전이고 반야사상의 핵심이 담긴 경전입니다. 초기 대승불교 사상인 공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금강경>의 핵심 논리는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다. 법은 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법이다. 법은 비법이요 시명이 법이니라. 이런 표현들이 <금강경>에 숱하게 나옵니다.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됩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예로 들어, 핸드폰은 핸드폰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핸드폰일 뿐인 것이지요. 우리가 핸드폰이라고 생각하는 이 물체, 이 존재는 사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이 그냥 핸드폰일 뿐입니다. 핸드폰은 말이고 이름이고 개념일 뿐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핸드폰이라는 것은 말일 뿐인데 마치 현실세계에 핸드폰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무명에 얽매여서 번뇌의 바다를 헤매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12연기로 해체해서 본다. (27p)

‘나’라고 하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봅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입니다. 이 다섯 가지로 해체하는 것입니다. 왜 해체합니까? 나라는 것은 현실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오온으로 해체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일체는 12처로 해체해서 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체는 이 세상인 것 같은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는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현대 철학으로 말하자면 주관과 객관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다 포함한 것이 일체입니다. 

이런 식으로 개념을 해체해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런 깨달음의 경지에 확실하게 오르면 열반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런 표현을 해체라고 하는 개념, 해체한다는 술어를 중심으로 놓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라는 것과 여기에서 말하는 ‘해체해서 보기’라는 것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뉘앙스가 다른 것이지요. 

개념의 해체’라는 통찰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 열반,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깨달음을 실현하려면 먼저 통찰을 해야 합니다. 통찰을 하면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이 바래면 깨달음을 성취합니다. 시작은 통찰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통찰이라는 것은 존재를 해체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무엇을 오온, 12처 등으로 해체해서 통찰할 때 그 존재에 대한 탐욕 욕심 집착이 떨어지고, 그랬을 때 열반이 실현됩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와도 같은 이야기인데 표현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통찰이란 무엇이냐? 개념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개념이란 무엇이냐?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입니다. 핸드폰, 시계, 마이크, 모니터 같은 것들입니다. 핸드폰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봐도 핸드폰은 없습니다. 유리, 플라스틱, 카메라 등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입니다. 각각의 재료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탄소, 수소, 산소 같은 것들입니다. 

그 어디에도 핸드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를 해체하는 것이고 개념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통찰이며, 그것이 불교적으로 나와 세계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들(신 수 심 법)로 해체해서 그 중의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 하나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반야, 위빳사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교 교리의 핵심도 해체해서 바라보는 것이며 불교 수행의 핵심도 해체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라는 존재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사마타를 하든 위빳사나를 하든 해체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교학과 수행의 핵심입니다. 

불교의 진리탐구는 지식 아닌 수행의 영역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는 진리의 탐구라는 측면이 있는데요. 해체해서 바라보는 것은 이 세계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학문은 지식입니다. 학문을 과학적으로 파고든다고 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더 정확해지고 풍부해질 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천문학자가 우주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풍부하고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주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하게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간성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학문과 행복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진리를 올바로 알고,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해야만 지식이 지혜가 됩니다. 이것이 지식과 지혜의 차이입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현대학문에서 추구하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말하자면 지식이 지혜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이 자기화가 되어야 하고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프로이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의 마음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초적인 자아, 자아, 초자아인데요.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지식은 의식의 일부분입니다. 지식이 원초적인 자아와 자아, 초자아를 다 포괄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행복을 가져다 주려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무의식적인 습관과 행동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내 삶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이고, 지혜가 될 때 나의 의식, 원초적 자아나 초자아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바뀔 때만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에서도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교리적 부분과 수행적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만큼 수행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수행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열반을 이르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 반드시 삼매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삼매에 도달해서 무아의 상태, 연기의 상태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삼매를 경과하지 않고 완전한 깨달음,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교리적으로 아무리 이해한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반드시 이론과 수행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방법론적 핵심은 교학 뿐만 아니라 수행 역시도 해체해서 보는 데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1장 들어가는 말을 살펴보았습니다. 

핵심정리 첫째, 초기불교는 지금 현재 남방에 전승되고 있는 빠알리 3장을 이야기합니다. 둘째, 20세기 들어 다양한 불교를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있기에 대승불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의 불교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부처님 당시의 불교, 부처님과 부처님 직 제자들의 불교가 어떤 모습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기초가 됩니다. 셋째, 초기불교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 입니다. 무엇을 해체한다? 개념을 해체합니다. 개념이라는 것이 무상하며 실상은 무아임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아는 것이 내 삶의 지표가 되는 것이 불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2장 초기불교의 기본 주제 – 행복의 추구

초기불교 뿐만 아니라 불교 자체가 지향하는 목표가 행복의 추구입니다.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제2장에서는 불교가 무엇을 지향하는 지를 제시한 이후에 각론으로 들어갑니다. 초기불교의 기본 주제는 행복이고, 진정한 행복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므로 다음 장에서 열반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 다음에는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이 1편을 구성합니다. 1편은 말 그대로 초기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총론적으로 접근하는 편입니다.

  •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31p)

여러 학문들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의 탐구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모든 학문의 목적입니다. 심지어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 영어로 필로소피(Philosophy)라고 표현하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인 필로소피아,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동양문화권에서의 철학, 종교의 목표는 지식의 탐구를 넘어서서 실천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불교도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의 추구에 놓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제가 과연 맞는 이야기일까요? 이것을 진지하게 탐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목적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21세기에 대한민국에 사는 남자로 태어나겠다.”고 마음 먹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난 뒤에 나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고, 태어난 뒤에 내가 무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은 삶의 목적, 존재의 이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무상한 인생의 목표? 
;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로 이해하기

그렇다면 인생에 목표가 없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목표가 없다면 막 살아도 되는 거겠지요. “내일은 없다” 하면서 맘대로 살아도 되겠지요. 실제로 욜로족이라던가 욜로에서 조금 더 발전한 소확행 등은 목표를 상실한 현대인들이 차선책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나눕니다. 진리 그 자체를 탐구해보면 무상이고 무아이지만, 실제 살아가는 현실에서 ‘내가 없다’ ‘핸드폰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 생활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무아이고 무상하다’는 것은 사실이나, 실제 살아가면서는 임시로 존재하는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리합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이유나 목적은 진리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이나, 현실세계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표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삶에 의미가 있다 없다, 인생에 목표가 있다 없다 하는 명제에 대해 진제와 속제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제대로 이 삶을 영위하자면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삶의 원칙을 정하고 그때그때 달성해야 할 삶의 과제를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교는 바로 그러한 방법,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의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추구입니다. 물론 깨닫고 보니 행복이라는 것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고, 열반은 특별한 상태라기보다는 내 안의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인 것인데, ‘이것이 열반이다’라고 정의하면 그 상태가 아닌 것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고 열반이 아닌 것이 되므로 한계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행복을 추구하되 진리의 측면에서는 존재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보시, 지계, 수행이 궁극적 행복으로 가는 길

불교는 ‘어떻게 하면 궁극적인 행복으로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실제 내용은 아주 심플합니다. 

  • ‘법을 잘 닦는다.’는 것은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즉 보시는 보시바라밀에, 지계는 지계 바라밀에, 수행은 나머지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네 바라밀에 배대가 된다. (32p)

이 말은 육바라밀을 닦으면 금생에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시, 지계, 수행을 닦으면 지금 생에서도 행복하고 다음 생에서도 행복합니다. 보시와 지계만 잘 해도 금생에서도 행복하고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지만, 수행까지 열심히 하면 궁극적인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지금 생에서 행복한 것, 다음 생까지 행복한 것, 영원히 행복한 것으로 나누는데 이 세 가지 모두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달리 표현한 것이 34쪽에 나옵니다. 

  • 기술만으로 금생의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 사람이 전문직종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나쁜 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사회와 자신을 망가지게 한다. 바른 인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이웃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각각 지계와 보시로 강조하셨다. (34p)

지계와 봉사를 제대로 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생활하는 집단인 사부대중에 대한 믿음이 갖춰져야 합니다. 불법승에 대한 믿음이 갖춰지면 금생도 내생도 행복합니다. 여기에 수행까지 갖춰지면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전문적인 기술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전문가가 된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돈을 조금 더 벌고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행복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보시와 지계, 바른 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실현하는 토대 (39p)

  •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는 토대로 <쌍윳다 니까야> ‘예류 쌍윳따’(S55)는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를 지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39p)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을 장작불에 비유해볼까요? 불법승에 대한 믿음과 지계, 보시는 장작불이 계속 타게 하는 장작과도 같습니다. 만약 장작을 어마어마하게 쌓아 두었더라도 불을 펴서 태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보시를 잘 하고 계를 지키고 불법승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해도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장작에 불을 어떻게 붙이는지 알고, 불 붙은 장작불을 잘 관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장작이 없다면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장작이 있어야 불을 붙이는 것이지요. 

이것은 수행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있고 계를 지키고 보시를 하는 것이 바탕에 있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행도 중요하지만 계를 지키고 항상 보시하는 마음을 기본에 깔아 두어야 계속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수행을 지속하는 에너지가 있어야만 어려움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고 수행을 지속할 수 있으며 열반을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간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행은 스님들이 하는 것이고 나는 복만 많이 짓겠다고 생각하는 신도분들 계시지요? 물론 이것만 해도 좋습니다만, 우리의 목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는 것을 환기하십시오.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강렬한 의지 없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는 삶에 만족한다면 영원한 행복으로는 가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초발심, 각오와 의지를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대로 위빳사나나 사마타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내지는 불교 교리에 해박하거나 수행을 열심히 하더라도 계율을 지키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수행은 힘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수행의 외관만 갖추는 것이고 개인을 위한 수행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수행에 마장이 들어서 삿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보시와 지계, 믿음은 나에게 행복을 주는 토대가 되고, 수행은 내가 행복의 길로 가게 하는 하나의 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갖춰야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의 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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