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명 산적을 교화한 상낏짜 사미

법구경 110번째 게송, 500명의 도적을 교화시킨 쌍낏짜 사미의 이야기. 7살 난 어린 사미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기 그지 없다. 이는 성인인 수행자들보다 높은 경지의 바른 수행의 결과이다.
넓은 의미에서 수행자는 불교를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좁은 의미로는 전업하여 수행자인 ‘프로 수행자’를 말할 것이다. 다만 성직자와 수행자는 별개의 의미이다.
좁고 넓은 수행자를 알아보며, 우리 자신은 어떤 수행자가 되어야 하는지 또한 수행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아본다.

#법구경, 수행, 알아차림

법구경은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부처님 당시에 만든 경전이라고 합니다. 아주 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죠. 법구경에 많은 게송들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그 중에서 110번째 게송을 가지고 이야기 해볼까합니다.

계를 지키지 않고 감각기관도 다스리지 않고 100년을 사는 것보다

계를 지키고 수행하며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값지다.

계를 지키지 않고 감각기관도 다스리지 않고 100년을 사는 것보다

계를 지키고 명상하며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욱 값지다.

위의 게송은 부처님께서 실제로 하신 게송입니다. 이 게송을 하시게 된 데는 그 나름대로 당시의 일화가 있습니다. 상낏짜 사미라고 하는 일곱 살 난 사미가 500명의 산적을 교화시킨 이야기입니다.

500명의 도적을 교화시킨 쌍낏짜 사미의 이야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제자 중 가장 지혜로운 사리불 존자를 모시는 상낏짜라는 7살난 어린 사미가 있었습니다. 한편 귀족 가문 출신의 30명의 사람들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이 30인의 비구들을 사리불 존자에게 보냈지요. 그러나 사리불 존자께서는 이들을 직접 거두지 않고 상낏짜 사미가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니 데리고 가서 안거를 나라고 하였습니다. 30인의 비구들은 어린 사미가 오히려 수행에 방해될 뿐이라고 처음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리불 존자의 뜻이 분명하여 어쩔 수 없이 어린 사미를 데리고 안거할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이내 한 마을에서 수행할 처소를 제공하고 매일 공양물을 올리겠다고 청하니 그 곳에서 안거를 나기로 하였습니다. 비구들은 아침에 탁발하러 나갈 때와 저녁에 청소할 때 말고는 둘 이상 같이 다니지 말고, 각자 개인의 처소에서 열심히 수행에 정진하되,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종을 쳐서 알리자고 약속하고 안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몹시 굶주린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마침 30인의 비구 무리가 공양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그네는 궂은 일을 다 할 테니 자신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고, 비구들은 이 나그네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이내 비구들과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무리에서 빠져 나와 숲 속을 가다가 500명의 도적에게 붙잡혔습니다.

500명의 도적들은 “이 숲속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을 잡아서 숲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하고 마침 숲 속에 들어온 나그네를 잡아 제물로 바치기로 합니다. 나그네는 너무 놀라 산적 두목에게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저 같이 천한 사람을 신께 제사 올리면 신을 진노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훌륭한 귀족 가문 출신의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귀한 스님들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면 그거야 말로 신에게 아주 좋은 공양이 될 것입니다.”

500명의 도적들은 나그네를 앞세워 비구들의 처소로 갔습니다. 나그네가 종을 땅땅땅 치니 약속이라도 한 듯 스님들이 모였습니다. 비구 중에 제일 높은 비구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도적 두목이 당신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는 ‘내가 수행자 무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니 내가 대표로 잡혀 가서 공양물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공양물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높은 스님이 “아닙니다, 스님은 우리의 무리를 이끌어 가야 하니까 계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합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스님이 나서서 ‘제가 가겠습니다’, 또 네 번째 스님이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쌍낏자 사미에게까지 왔습니다.

어린 쌍낏짜 사미가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하니, 비구들은, “사리불 존자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너를 부탁을 했는데 만약에 네가 죽임을 당하면 우리가 그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너는 가지 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린 사미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닙니다. 사리불 존자께서 저를 보낸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함이었으니 비구들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래야지만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됩니다.”

이렇게 어린 사미가 도적들한테 대표로 잡혀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적 두목이 칼로 사미의 목을 쳐도, 목이 날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칼날이 부서졌습니다. 도적 두목이 어린 사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칼을 들고 목을 치려 하면 사람들은 두려워서 공포에 떠는데 당신은 어째서 공포에 질려 울부짖지 않습니까?”

어린 사미가 답했습니다.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은 정신적 괴로움이 없고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초월합니다. 존재하려는 욕망이 파괴되어 버리면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단지 천근의 짐을 내려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린 사미의 대답에 도적 두목은 감화를 받아 출가를 결심합니다. 두목이 출가한다 하니 부하들도 두목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사미는 500명의 도적을 데리고 다시 30명의 비구들에게 돌아왔습니다. 비구들은 너무나 감동하여 부처님께 가서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처음에 말한 게송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사회와 지금 우리 사회의 차이

이 이야기의 교훈을 정리해보고 마칠까 합니다. 첫 번째, 어떻게 7살 먹은 사미가 500명의 도적을 교화를 시킬 수 있었을까?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더구나 어떻게 마을 사람들이 생면부지의 수행자 무리에게 덜컥 ‘우리가 당신네들을 앞으로 세 달 동안 먹여 살릴 테니 당신네들은 열심히 수행만 하십시오’ 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요즘 세상과 비교를 해봅시다. 요즘 30명 정도 무리가 수행을 한다고 왔다 갔다 하면 사람들이 뭐라 그럴까요? 사이비 종교 무리가 또 하나 나타났다고 할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비교하면 불교가 등장했던 과거 인도 사회는 지금 우리 사회와는 달라도 아주 많이 다릅니다. 이거슬 모르고 불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때 당시의 인도 사회는 수행자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면 내가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수행자를 공경하고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고타마 싯타르다 같은 수행자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신이 되어버릴 정도였습니다.

넓은 의미의 수행자, 항상 수행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수행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넓은 의미의 수행자는 불교를 믿고 부처님 말씀대로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다 수행자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출가자와 재가자 할 것 없이 항상 수행하는 마음 자세로 사는 사람은 다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 수행을 하니까 밥이 나옵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열심히 수행을 하는구나. 그러면 당신이 열심히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당신이 먹고 사는데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당신에게 공양을 올리겠다. 이렇게 공양한 공덕으로 내게 복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공양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수행자에게 공경하고, 수행자에게 공양 올리는 것을 커다란 공덕으로 여기는 문화가 희박합니다. 우리 사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힌두교 전통의 인도 사회와 수천년동안 유교 전통이 내려온 극동 아시아에 속한 우리 사회와의 문화 차이일 뿐입니다. 게다가 요즘 사회는 자본주의의 삶이 지배적입니다.

좁은 의미의 수행자, 전업적인 수행자

좁은 의미의 수행자는 약간 다릅니다. 우리 사회처럼 수행자를 공경하고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문화가 보편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특히나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수행자에게 공양 올리는 인도 사회의 전통은 “수행의 대가로 밥을 받는다”라는 것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쉬운 말로 ‘프로 수행자’, ‘월급쟁이 수행자’라고 할까요. 표현이 좀 천박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비구라는 인도 말의 뜻은 걸사(乞士)입니다. 걸인 걸(乞)에 선비 사(士). 즉 거지는 거지인데 선비처럼 고상하고 당당하게 구걸하는 거지라는 겁니다. 수행자는 내가 수행을 하는 대가로 공양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수행자에게 수행의 대가를 지불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복을 빌기 위해서, 혹은 소원을 빌기 위해서, 혹은 자신은 하기 힘든 수행을 하는 수행자를 존경해서 등등 개인마다 이유는 다를 것입니다.

성직자와 수행자는 범주가 다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헷갈려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성직자와 수행자입니다. 성직자는 종교 의식을 대신 해주는 사람입니다. 신도들을 대신해서 신과 소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직자이면서도 넓은 의미의 수행자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성직자이나 넓은 의미의 수행자는 아닌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성직자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의 수행자인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행자는 범주가 다릅니다. 즉 별개입니다.

출가한 수행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직접 노동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라는 이유로 공양을 받고 있다면, 당연히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불교의 수행자들을 스님이라고 합니다. 스님들은 수행자입니다. 수행하지 않는다면 스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수행을 해야만 스님입니다.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은 오로지 수행만 하기 때문에 온전히 좁은 의미의 수행자입니다. 그러나 저처럼 시내의 사찰에서 포교의 소임을 맡아 보는 스님이나 아니면 불공, 예불, 기도, 제사같은 각종 불교의식을 집전하는 스님들은 기본적으로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신도들을 상대하는 성직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직자라는 역할에 매몰되어 수행자라는 본연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수행을 게을리 한다면 스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님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불교는 편차가 엄청나게 큽니다. 한 편에서는 점쟁이인지 스님인지 구별이 안 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조계종같은 특별한 소속도 없이, 점도 봐주고 부적도 써주고 제사도 지내주는 무늬만 스님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는 승복을 입었을 뿐, 스님은 일종의 생계수단, 좋게 말해서 직업에 불과합니다. 수행자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일반인은 출입조차 못하는 문경 봉암사에서 절 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수행만 하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재가신자들은 지혜로운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무늬만 스님인지 아니면 제대로된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는 스님인지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지혜의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수행자로서의 스님인지, 성직자로서의 스님인지, 직업인으로서의 스님인지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집착에서 오고, 괴로움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두 번째, 어린 사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은 정신적 괴로움이 없고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초월한다.”

역으로 말하면 욕망이 있으면 괴롭고, 집착하는 게 있으면 두렵다. 그러니까 욕망이 괴로움을 낳고 집착이 두려움을 낳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식이 내 말을 안 들으면 두렵습니까? 아니죠. 화가 납니다. 화가 나는 건 괴로운 겁니다. 이것은 욕망입니다. 반대로 자식이 혼자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시다. 끼니는 거르지 않고 잘 먹고 지내는지, 총기사고라 나지 않을지 하루하루가 불안불안합니다. 자식을 혼자 미국에 보내 놓고 두려운 것입니다. 이건 집착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욕망과 집착은 이렇게 다릅니다. 물론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면 집착은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욕망이 깊어지면 집착이 되는 것입니다.

욕망은 괴로움을 낳고 집착은 두려움을 낳는다는 이 말은 우리가 머릿속에 입력해 놓을 필요가 있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역으로 내 마음속에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내가 뭔가에 집착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게 없다면? 자식들도 다 잘 살고 남편 사업도 잘 되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불안한 마음이 있다면? 한 가지 딱 놓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집착의 가장 근본적인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가장 큰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자식에게 집착하고 자식에게 혹시라도 좋지않은 일이 생길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다름 아닌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이라면 불안해하고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남의 자식이라면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결국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에게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상낏짜 사미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천근의 짐을 내려놓는 것에 불과한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나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이 육신은 내가 아니다’ 라는 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고 뼈저리게 느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 상낏짜 사미처럼 없어야 됩니다. 오히려 죽음이 나에게 다가올 때, ‘이제야 이 무거운 육신의 짐을 벗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화한 것입니다.

내가 병이라도 걸리면 내 자식들은 어떻게 하나?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확대해서 보면 내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지금은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의 육신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잘 볼 수 있어야 진정한 불자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한다고 해서 집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릇된 욕망과 집착은 수행한 만큼 덜어집니다. ‘나는 스님이 아니니까 수행자가 아니다. 스님을 잘 모시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수행자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내 안의 그릇된 욕망과 집착을 덜어 낼 수 있고, 올바른 수행자를 볼 줄 아는 지혜도 갖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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