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하루와 초사흘에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것과 인연 따라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 중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궁극적으로는 내가 어떤 마음을 쓰느냐,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서 두 가지가 통할 수도 있고 서로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려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인데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그것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 법보다는 처세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귀거래사’라는 시로 유명한 도연명이라는 중국의 시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쯤 살던 사람인데요. 이 양반이 나름대로 일찍이 입신양명 출세의 뜻을 두고 과거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당시 중국은 아주 어지러운 시국이었습니다. 나라가 교체되는 힘든 시기에 지방 하급관리를 지내다가 금방 그만두고 40살에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20여 년간 농사를 지으며 살다 간 양반입니다.
오늘은 도연명의 시 중에 ‘신석(神釋)’이라는 시를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이 시를 바탕으로 연기법에 따라서 인생을 살려면 처세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도연명 ‘신석’
신석神釋 (정신이 육체와 그림자에게 하는 말)
도연명陶渊明
大鈞無私力 대균무사력 – 천지의 변화는 사사롭지 않고
萬理自森著 만리자삼저 – 모든 섭리는 뚜렷이 나타난다.
人爲三才中 인위삼재중 – 사람이 삼재(天·地·人) 속에 있는 것은
豈不以我故 기불이아고 – 나로서 비롯됨이 아니겠는가
與君雖異物 여군수이물 – 내가 그대들과 다른 존재이긴 하나
生而相依附 생이상의부 – 날 때부터 서로 의지해 함께 살면서
結託善惡同 결탁선악동 – 결탁하여 선과 악을 같이 했으니
安得不相語 안득불상어 – 어찌 한마디 안 하겠는가
三皇大聖人 삼황대성인 – 복희 신농 여와의 세 황제도
今復在何處 금부재하처 – 죽어서 지금은 어디에도 없으며
彭祖愛永年 팽조애영년 – 불로장생을 꿈꾸던 팽조도
欲留不得住 욕류부득주 – 결국 죽어 살아 남지 못했네
老少同一死 노소동일사 –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죽으면 마찬가지
賢愚無復數 현우무부수 – 어짐과 어리석음을 가늠할 수 없네
日醉惑能忘 왈취혹능망 – 술에 취하면 혹 잊는다 하나
將非促齡具 장비촉령구 – 오히려 늙음을 재촉하는 것 齡 나이 령
立善常所欣 입선상소흔 – 선한 일을 이루면 기쁘다 하나
誰當爲汝譽 수당위여예 – 누가 있어 그대를 알 것인가
甚念傷吾生 심념상오생 – 지나친 생각은 도리어 삶을 해치는 것
正宜委運去 정의위운거 – 마땅히 운명에 맡겨둬야지
縱浪大化中 종랑대화중 – 커다란 조화의 물결 속에서
不喜亦不懼 불희역불구 – 기뻐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말게나
應盡便須盡 응진편수진 –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 버리고
無復獨多慮 무복독다려 – 다시는 혼자 깊이 생각 마시게 (고독하게 걱정하지 마시게)
‘천지의 변화는 사사롭지 않고 모든 섭리는 뚜렷이 나타난다. 사람이 삼재(天·地·人) 속에 있는 것은 나로서 비롯됨이 아니겠는가.’
천지 변화는 사사롭지 않습니다. 해가 뜨고 별이 뜨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옵니다. 이런 천지의 변화는 누군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면 누구를 위한 겁니까? 모두를 위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냥 그런 거예요.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원래 그냥 그러하라는 말을 한자어로 쓰면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 자연입니다. 자연이 아름답다, 자연을 보호하자고 말할 때 자연이 이 자연입니다. 왜 이름을 자연이라고 붙였는가? 원래 그냥 그런 겁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요.
천지의 이치, 즉 자연의 이치는 사사로운 게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도 아니고 넓게 보면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모두를 위한 거예요. 살아있는 것 살아있지 않은 것, 유정 무정을 다 포함한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자연을 우리 인간만을 위해서 쓰고 있으니까 지금 인류가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섭리는 뚜렷이 나타납니다. 눈에 딱 보여요.
이어서 ‘사람이 삼재속에 있는것은 나로서 비롯됨이 아니겠는가.’라고 합니다. 삼재라는 표현은 유학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천, 지, 인. 무등산의 정상 이름이 천왕봉, 인왕봉, 지왕봉이지 않습니까. 삼재 천지인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내가 이 세상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이 세상은 나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내가 그대들과 다른 존재이긴 하나 날때부터 서로 의지해 함께 살면서 결탁하여 선과 악을 같이 했으니 어찌 한마디 안 하겠는가.’
인간들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이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와 너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제각각 다르게 태어났어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안돼요. 원래 그래요. 그냥 자연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을 탓할 수도 없고 천지신명을 탓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각각 다른 우리가 서로 의지해 살아간다
이렇게 날 때부터 다른 존재인 우리들이 서로 의지해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서로 의지하고 있더라는 거죠. 누군가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데 누구를 의지한다는 말인가? 나는 혼자서도 잘 산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가 없어요. 입고있는 옷, 먹는 식사, 타고다니는 차, 사는 집… 이런 것 중에 나 혼자 만든 게 하나라도 있으면 나와보십시오. 다 남이 만든 거예요. 이게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겁니다. 가족끼리 동료끼리 친구끼리 직접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 뿐만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게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지해서 살면서 좋은 일만 생기면 좋을 텐데, 살다보면 나쁜 일도 생기고 슬픈 일도 생기고 이런저런 일들이 생깁니다. 선과 악이 우리들 삶에 같이 있습니다. 서로 의지해서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복희 신농 여와의 세 황제도 죽어서 지금은 어디에도 없으며 불로장생을 꿈꾸던 팽조도 결국 죽어 살아 남지 못했네.’
복희 신농 여와는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황제들입니다. 일설에는 실존인물이라는 설도 있는데요.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할아버지쯤 되는 인물들입니다. 어쨌든 이런 위대한 사람들도, 신에 가까운 전설적인 인물들도 다 죽어서 이제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평조라는 사람도 중국에서 엄청 오래 산 사람이었나 봅니다. 이 분도 죽긴 죽더라 하는 것이 일종의 서론입니다. 살아보니까 세상이 이렇더라 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 어떤 마인드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쭉 이어집니다.
나이 많다고 지혜롭지 않고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죽으면 마찬가지 어짐과 어리석음을 가늠할 수 없네.’
‘어질다’라고 하는 표현을 ‘현명하다’라고 해석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현명하고 어리석은 것은 나이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늙었다고 현명하고 젊다 해서 어리석지 않습니다. 죽으면 다 똑같은데 함부로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나이 든 사람들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잘 모르는데,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을 대해는 데에 병폐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다른 사람 말을 안 듣는 겁니다. 나이 든 보살님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으면, 모두 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데 대화가 됩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더 나쁘게 말하면 머리가 굳었어요. 생각하기가 싫어요. 생각하기 전에 이미 자동적으로 머리속에 입력된 것이 튀어나옵니다. 다 해본 일이고 익숙한 일이니까 굳이 생각을 안합니다. 어떻게 하지, 이게 뭐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남의 이야기를 안 들어요. 또는 어떤 생각이 하나 머릿속에 들어오면 바꾸기가 싫습니다. 왜냐? 힘들거든요. 나이를 좀 먹으면 무엇을 바꾸는 게 불편하고 귀찮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나이 든 이가 지혜로운 측면이 있기도 하겠지만 경계해야 할 측면이 오히려 더 많습니다. 도연명도 이 시에서 나이가 많으면 지혜롭다고 단정할 수 없고 말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혹 잊는다 하나 오히려 늙음을 재촉하는 것.’
도연명이 술을 참 좋아했다고 합니다.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아한 것은 아니고 자연과 벗삼아 술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오죽 술을 좋아했으면 ‘웬만하면 관직에 나가기 싫은데 술값이 없어서 술을 못 마시니 술값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간다’는 시가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도 뭐라고 합니까? 술에 취하면 오히려 늙음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중독되는 것의 대표주자가 술입니다. 요즘 우리가 주로 많이 중독되는 게 유튜브, 티비, 홈쇼핑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중독되어 있는 것들이 많아요. 도연명이 볼 때,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을 때는 세상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지만 중독에 빠져 있던 그 시간 만큼을 허비하고 그만큼 늙어버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상을 내도 알아줄 사람 없으니
‘선한 일을 이루면 기쁘다 하나 누가 있어 그대를 알 것인가?’
이 구절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착한 일을 하면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고 굳이 내세우진 않지만 주변에서 칭찬하고 격려해주기를 속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역으로는 내가 아무리 괴롭고 슬퍼도 주변에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상을 내고 싶은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 게 무척 힘들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도연명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요?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해도 원래 인간들은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법이야. 그러니까 나도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기대하지 않으련다. 내가 생각할 떄 좋은 일이라면 열심히 해고 또 혼자 기뻐하는 마인드로 살자.’
넓게 보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연명 식으로 보면 자식도 남입니다.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남이에요. 인간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부모는 내가 태어날 떄부터 나에게 잘해줬으니까 원래 그런 걸로 아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부모로써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식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고 그냥 내가 기쁜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지나친 생각은 도리어 삶을 해치는 것, 마땅히 운명에 맡겨둬야지.’
생각은 적당히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이 하면 오히려 삶이 괴로워집니다. 제가 볼 때 많은 경우 보살님들은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자식이나 남편 등, 할 필요가 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도연명은 말합니다. 마땅히 운명에 맡겨두라고요. 운명에 맡긴다는 말이 세상만사 사주팔자 대로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결과에 대해서 운명에 수긍하라는 것이지, 과정에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연기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이라고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어떻게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느냐.’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왜 시험에서 떨어졌느냐’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죠. 내가 열심히 공부해도 인연이 안되면 떨어지는 거예요. 붙은 사람이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겠죠.
적당히 적당히 중도를 실천하자
이제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이야기하려고 오늘 이 시를 가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커다란 조화의 물결 속에서 기뻐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말게나.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 버리고 다시는 혼자 깊이 생각 마시게.’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야 합니다. 혼자서 고독하게 자꾸 되새김질하면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도연명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조화의 물결이란 천지의 변화를 이야기 합니다. 사사롭지 않은 자연이 굴러가는 이치를 기뻐하고 두려워한다고 해서 이 도도한 흐름이 바뀌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야 합니다. 걱정도 적당히 하고,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면 화도 적당히 내고,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적당히 하고 끝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어느 정도 수준에서 끝내고 다시는 혼자 자꾸 그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중국 당대의 유명했던 문인들을 보면 나름대로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도연명의 이 시 같은 마인드로 삽시다. 그러면 이 세상을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고, 그 마음을 법정스님이 이야기하듯 인연따라 일으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