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꿀 것인가 나를 바꿀 것인가

부처님은 주의깊게 마음챙김을 즐기고 제멋대로 방일하게 지내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수행길을 가는 비구들을 두고 ‘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하는 자’라 말했다.
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바꾸는 수행을 하고 중생들은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한다. 중생은 자신의 마음대로 변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바꾸고 싶은 것이 자기 내부의 문제인자 외부의 문제인지를 잘 판단하고 아는 일이다. 그런 후에야 내가 바뀌는 것이 곧 세상이 바뀌는 길이며 세상을 바꾸는 것이 곧 내가 바뀌는 것이라는 진리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감정, 법구경, 선거, 수행, 정치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는 수행자

주의깊게 마음챙김을 즐기고 제멋대로 방일하게 지내는 삶에서 위태로움을 보는 비구는 불길이 크고 작은 숲을 태우고 가듯 족쇄를 태우며 나아간다.

 <법구경> 31 게송

주의깊게 마음챙김을 즐기고 제멋대로 방일하게 지내는 삶에서 위험을 보는 비구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열반을 향해 나아간다

<법구경> 32 게송

한 비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혼자 떨어져 나와 수행을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수행이 잘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좋은 수행처를 찾아가던 중에 불길을 만난 비구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높은 바위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불길이 맹렬하게 번지면서 나무며 숲을 태우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비구는 ‘아! 내 마음 속에 있는 온갖 번뇌와 장애들을 지혜의 불길로 태워버려야겠다.’고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한 끝에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법구경 31번 게송은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법구경 32번 게송에도 일화가 있습니다. 아주 검소하게 생활하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 이 비구는 친척들이 사는 마을 부근에서 수행을 하며 친척들이 올리는 공양물을 받아 생활을 했습니다. 큰 도시나 훌륭한 재가자들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해 화려하고 맛있는 성찬을 공양할 때에도 비구는 자신의 수행처만을 지키며 검소하게 지냈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이 비구가 개인행동을 하고 일가친척과 어울리며 방자하게 공양청을 거절한다며 험담을 했습니다. 비구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이 마을에서 공양을 주는 대로 생활할 뿐입니다. 장자들이 여는 공양에 가지 않는 것은 진수성찬과 화려한 음식을 굳이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일 분입니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저 비구는 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하는 비구다.”라며 부처님의 전생담을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앵무새의 왕으로 태어난 때의 이야기입니다. 앵무새왕으로 태어난 부처님과 그의 앵무 무리들은 무화과 나무에서 무화과 나무가 제공하는 것들만 먹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천신이 앵무새 왕의 검소함을 직접 시험하기 위하여 무화과 나무를 바짝 말려 죽인 후 천신의 아내를 거위로 변신시켜 앵무의 무리 곁으로 보냈습니다. 

거위가 물었습니다. “앵무새 왕이여. 당신은 왜 말라버려서 더이상 먹을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떠나지 않습니까?” 앵무새왕이 답했습니다. “이 나무가 오랜 시간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제공했기 대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화과 열매를먹을 수 없더라도 있는 그대로 검소하게 살 뿐입니다.” 두 번째 게송의 비구는 이러한 부처님의 검소함을 그대로 이어 받은 비구인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중생

내년 상반기 총선을 앞두고 광주 시내에 정당의 현수막들이 걸려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현수막에는 국회의원들이 입법한 내용들과 지역에서 실행할 사업에 대한 홍보가 실립니다. 지역구를 위해서 이런 일들을 했고 우리 지역민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다음에도 자신을 찍어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지역구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저는 어제 화순군 쪽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습니다. 단풍 구경을 나섰는데 단풍은 별로 못 봤고, 언제 가든지 그대로인 듯한 동네 풍경만 바라보다가 돌아왔습니다. 한적하고 외진 동네 풍경을 보니 ‘이곳 주민들은 국회의원에게 요구하거나 민원을 잘 넣지 않나보다.’ 라는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네가 변함 없이 그대로 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예산을 투입해 무언가를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과 같지 않겠습니까. 

중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회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면 옛날처럼 민주화 시위를 통해 정부를 바꾸고 법을 바꾸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꼭 이런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지역 주민들의 민원과 요구들이 쌓이고 쌓여서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바꾸고 싶지만 따라주지 않는 세상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 교토 편에 평등원이라는 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평등원은 서방정토 세계를 이 지상에 구현하기 위하여 당시에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건축한 절입니다. 법당 건물 앞에는 아미타 극락세계의 구품연지를 상징하는 연못이있습니다. 중생들이 죽어서 극락세계에 날 때, 처음에는 연꽃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극락세계에는 아홉 개의 연꽃 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품상생부터 하품하생으로 표현되는 구품연지입니다. 

유홍준 교수는 평등원을 보고 그 나라의 문화재 복원 능력과 시스템에 부러움을 느꼈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자신이 문화재청장으로 있을때 불국사의 구품연지 연못을 복원하고자 했으나 예산 관계상 그럴 수 없었다는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처지의 일본 평등원은 너무나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의 문화재 실정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문화재 복원 중요하지 않아서 예산이 내려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의료나 복지 분야에 대한요구가 훨씬 높으니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일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쓰여 있었습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정의를 내세우고 어떤 사람은 복지를 내세우고 어떤 사람은 민주, 또 어떤 사람은 자유라는 기치를 내세우지만 변함 없는 결론은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족쇄를 태우며 나아가는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템플스테이 차담을 하면서 많이 받는 질문은 화를 어떻게 하면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같이 생활해야만 할 때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내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을까요?” 

이 말은 곧 가정이든 직장이든 내 주변의 것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꾸려가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어디에나 적용됩니다. 사회든, 법이든, 내 주변 사람이든 모든 것을 내 마음 대로 바꾸고 싶은 것이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최근 젊은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님들은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굳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면서 수행하고 살아야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수행하는 것이 당장 나에게 좋은 일을 가져오는 것도 아닌데 왜 수행을 하나요?” 참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수행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수행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공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행은 닦을 수(修)에 행동 행(行), 내가 나의 다스리고 챙긴다는 의미입니다. 수행의 본질은 행을 다듬어 변화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활 방식이 변하고 성격이 변하고 습관이나 체질까지도 변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내가 변하자고 하면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수행은 싫지만 참고 하는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 수행을 한다면서 좌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사경을 하지만 정작 본인의 행이 변하지않는다면 그것은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게송에서 “마음챙김을 즐기고 제멋대로 방일하는 삶에서 위험을 보는 비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의깊게 마음챙김을 즐기는 것입니다. 수행의 처음은 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멋대로 방일하게 지내는삶은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위험을 고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날뛰는 자신의 행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결국 열반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떻게 나아갑니까? 첫 번째 게송에서와 같이 자기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족쇄를 태우며 나아갑니다.  

수행제멋대로 마음을 가다듬는 

수행은 나 자신을 주의깊게 챙기는 것이고 그 다음 나의 행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성내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을 하려면 가장 먼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 나의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밖에서 이런저런 조건이 변화하여 생기는 일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 기분이 좋다, 화를 낸다, 우울감에 빠졌다 하는 감정들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문제입니다. 이런 감정을 잘 살피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내 안의 문제인지 밖의 문제인지를 먼저 슬기롭게 구분해야 합니다. 

“인생이 힘들다”, “직장상사 때문에 회사 생활이 괴롭다”, “잘못된 정치인들 때문에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제가 볼 때는 내부의 문제와 외부의 문제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서 나에게 분노, 질투, 좌절감, 상실감 같은 감정을 건네주어서 감정들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조건을 제공했겠지만 이러한 감정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부의 문제인가 외부의 문제인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 나를 바꿀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이 내부의 문제인지 내부의 문제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부의 문제라면 나를 잘 다스리는 것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고요. 그것이 외부의 문제라면 외부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달리 말해 내가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무기력에 빠지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하지 세상이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들에게 길을 확장해 달라, 복지수당을 신설해달라 요구해서 세상이 좋아지면 자동으로 나도 행복해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외부의것들, 세상의 것들은 내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반대로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을 망하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이 원망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감정을 잘 관찰해서 다스려야겠다고 마음 먹어야만 비로소 내 밖에 있는 원인들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이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납니다. 

내 안의 감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사회의 문제도 해결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반대로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내 안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외부에서 얼마나 많은 성과를 얻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또 다른 욕구와 불만 욕심이 생겨나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때도 사회 문제에 개인의 감정과 욕심을 개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의 감정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정하게 외부의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세상이 나고 내가 세상이다

불교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을 씁니다. 위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곧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 곧 내가 깨달음을 얻는 길입니다. 이 둘은 달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수행이 곧 세상을 바꾸는 노력이고, 세상을 바꾸는 노력을 할 때 내 마음도 수행을 한다는 생각을 해야 세상을 올바르게 바꿀 수있습니다. 

흔히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마음이 종교이기 때문에 사회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문제와 내가 처해있는 현실은 결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 본 것에 의지하여 감정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러니 내 마음만 잘 다스린다고 해서 세상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해결되지 않고는 근본적인 마음의 평화도 찾기 어렵습니다. 

나를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 나를 바꾼다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잘 가다듬어 나갈 때, 다시 말해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내 마음을 관찰하고 수행할 때 우리 모두의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면 이 세상 또한 안정되고 평화롭고 고요해집니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나와 세상에 대해 어느 것이 우선이고 먼저라고 따질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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