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의례에서 한글의례로
4월 1일부터 새벽예불을 한글로 하고 있습니다. 새벽예불에 참석하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은 불자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분들을배려하고자 예불문을 한글로 독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스님들은 한문으로 하는 것이 너무 익숙해서 한글이 오히려 힘듭니다만, 며칠지나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은 옛날 같은 국한문 혼용 시대가 아니라 한글 전용 시대이니 만큼 누구나 사찰의 문화를 쉽게 알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길게 보면 재(齋) 지내는 것도 한글로 진행해야 참석하신 제주 분들이 제사의 의미와 내용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의 한문 문화를 한글로 옮기는 데에 가장 큰 장벽은 사실 우리 스님들입니다. 또 절에 오래 다닌 신도분들 역시 한문으로 하는 것이 익숙해서 한글로 바꾸면 상당히 어색하고 적응하기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무슨 말인지 모르고 하는 것과 알고 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한문의 한글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도 ‘생활불교’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이 생활불교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애매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우리 시대의 생활불교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생활불교는 전업불교가 아니다
제가 가끔 보는 유튜브가 있습니다.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이 혼자 시골에 가서 귀촌하여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가족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본인을 유복한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고 자라 유학도 다녀오고 평탄하게 살아온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어머니가 출가를 했다고 말입니다.
교사였던 어머니가 40대 중반의 어느 날 자식 셋을 두고 출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조계종으로 출가하려면 이혼을 하고 서류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흔히 말하는 토굴살이를 시작했답니다. 대단한 분 아닙니까. 부처님도 혼자 수행해서 깨달았는데 절에서 안 받아주면 나 혼자 수행하겠다고 한 거예요. 졸지에 아버지가 혼자 자식 셋을 다 돌보랴 돈 벌어오랴 수행하는 아내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을 했다고, 그런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더라고요.
이런 분은 사실 평범한 분이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출가한 것은 아니지만 집을 떠나 자신의 삶 전체를 전적으로 수행에 투신하는 경우를두고 생활불교라 하지는 않습니다. 또는 저 같이 공식적으로 출가해서 불교의 종단 안에서 성직자로 사는 경우도 일반적인 의미의 생활불교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노년에 남은 생을 수행에 전념하겠다고 하는 경우 역시 생활불교라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출가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신도 중에는 절에 아주 열성적으로 다니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눈만 뜨면 절에 가서 기도하고 봉사하는 분들의 삶을 두고 생활불교를 실천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그야말로 독실한 불자라고 표현하지요.
생활불교라고 말할 때는 일상이 이뤄지는 공간과 시간을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면 밥 먹고 자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돈 벌고 일하고 친구를 만나고 운전해서 외출을 하는. 어떻게 하면 평소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삶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키워가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이생활불교라는 표현에 담긴 핵심입니다.
생활불교는 힐링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활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흔히 생활불교라는 말을 하면 명상이나 힐링 같은 단어가 연관되어 떠오릅니다. 과연생활불교의 목표가 내 마음을 치유하는 것, 즉 ‘힐링’일까요?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힐링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울 때 주변을 조용히 만들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을 피워놓고 조용한명상음악을 틀고 편안하게 있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런 행위는 말하자면 마음이 괴로운 원인을 살펴서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우선 급한 대로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 진통제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템플스테이에 오신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오니까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아요.”, “이런저런 생각들로 고민이많았는데 절에 와있으니까 고민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힐링입니다. 일시적으로 괜찮아지는 거예요.
문제는 힐링이 일시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일시적인 괴로움의 회피나 정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생활불교의 목표 역시 힐링이 될 수 없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것은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을 이해하고 체득한 다음 무아를 통찰하여 내 안의 모든 번뇌를 깨끗하게 씻어내 청정한 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생활불교 역시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을 지향합니다.
생활불교는 일상생활에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생활’ 불교에서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지향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수행하고 오랜 시간 끊임 없이 수행하는 것인데, 먹을 때 먹고 놀 때 놀고 잘 때 자고 친구 만나는 것 다 만나는 생활 속에서 무슨 재주로 수행을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생활불교란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불교는 불교의 틀 속에 있되, 전통적인 수행이나 의식에 있는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을 하는 공간 내지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나 의식 같은 전통적인 불교는 생활불교라는 틀에 담아내기 힘들다는 것인데, 전통적인 수행이나 의식을 제외한 생활불교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하면 도무지 실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면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집에서 그냥 시간을 보낼 때 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기존에 짜여진 사찰에서의 기도와 수행, 철야정진 같은 것들에 매우 익숙합니다. 기도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찰이라는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을 한다는 개념에는 익숙하지가 못한 겁니다.
생활불교는 팔정도의 실천
원점에서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집에서 나 혼자 따로 할 수 있는 수행법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불교는 팔정도와 계정혜삼학을 일상 생활에서 그냥 하는 것입니다.
팔정도 중 정사, 정어, 정업의 세 가지는 계를 지키는 행위입니다. 마음으로 몸으로 입으로 짓는 업에 대해서 악업은 끊고 선업을 키워 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 십악참회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생활불교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한다거나 말을 화려하게 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헷갈리게 하는 것. 여기에서 이 말하고 저기에서 저 말하는 것. 말을 거칠게 하는 것. 일상생활에서 나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항상 관찰하는 것입니다.
정정진은 사정근을 말합니다. 이미 내가 범한 악업은 더이상 범하지 않게 노력하고, 아직 짓지 않은 악업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이미지은 선업은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아직 짓지 않은 선업은 새롭게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선악의 기준은 수행에 있습니다. 수행에 도움이 되면 선이고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악입니다.
정념은 사념처 수행입니다.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고 부처님 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일상생활을 하면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갈 때, 설거지를 할 때, 지금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혹은 내 몸 어디에 통증이 느껴지는지를 관찰합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앉아서 마음을 집중해보는 수행도 좋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팔정도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부처의 행’이 생활불교의 기준
지금까지는 어려운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생활불교란 팔정도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간단히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상 속의 수행을 스스로 잘 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기준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이런 겁니다. 저는 제 방 청소를 할 때 특별히 어질러진 물건이 없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으면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볼 때는 깨끗함의 기준이 다릅니다.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 것은 물론이고 손에 묻어나오는 먼지가 없어야 깨끗하다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내 방이 깨끗한데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이 보면 더러운 겁니다.
팔정도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팔정도를 일상 속에서 어느 정도로 하는 게 맞다고 메뉴얼이 나와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 안에 참고할 만한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래의 게송을 읽어봅시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앉으나 서나 늘 따라다니고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함께 있으며
털끝만치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구나
부처 간 곳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 말소리 나는 곳이 부처로세
부대사의 유명한 게송입니다.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바로 부처라고 생각하면, 내가 하는 말이 부처가 하는 말이고 내가 하는 생각이 부처가 하는 생각이고 내가 하는 행동이 부처의 행동이 됩니다. 거짓말을 한다거나 음행을 하는 것은 부처의 행이 아니니 안 하는 것이지요.
기준이 복잡할 것 없습니다. 부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이렇게 질문하면 간단합니다. 내가 그 생각대로 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 다음 문제죠. 평소에 부처가 밥하고 부처가 빨래하고 부처가 친구들하고 논다고 생각하는 것이 팔정도 수행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생활불교라는 이름 속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안정을 찾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힐링도 필요합니다만, 거기에서 그치지말고 내가 바로 부처라는 생각으로 팔정도 수행을 하는 것이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