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칠월칠석이었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 만에 만나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눈물을 흘린 날이지요.
오늘 아침까지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두 사람의 깊디 깊은 정을 생각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소리 없이 나오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나름 대로 정이 깊은 부부지간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정이 깊은데도 옥황상제에 의해 강제로 헤어지게 된 이유는 두 사람이 혼인 후에 서로에게 깊이 빠진 나머지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는 말을 합니다. 친구간의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만인에 대한 자비 등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오늘이 시간에 언급하는 사랑은 오직 남녀간의 사랑만을 다룹니다.
과연 연애와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연애와 정으로 구분됩니다. 연애는 보다 본능적인 짝짓기고 정은 사랑, 혹은 애착을 의미합니다.
이성적 사랑의 3단계
남녀간의 사랑은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망하는 단계입니다. 연애라는 행위 자체를 갈망하여 이성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실제 만남을 가지는 단계입니다. 남녀가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데이트를 하고 서로 깊이 빠지게 되어 끌리는 단계입니다.
끌림의 시기 전반부에는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려는 노력을 합니다. 마치 정치인이 어떻게 하면 내 표를 한 표라도 더만들까 유권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처럼,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면 그때부터는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이렇게 불타오르는 사랑은 이러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호르몬이 작용하는 1년3개월여에 걸쳐 지속됩니다.
불 같은 사랑의 시기가 지나면 세 번째 단계인 애착의 단계로 전환합니다. 애착의 단계는 남녀간 사랑이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흔히 정(情)이라고 말하는 단계인데요. 정의 본질은 애착과 집착, 다시 말해 소유욕입니다. 상대방을 정서적으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감정, 그리고 상대방을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이 바로 남녀간의 사랑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입니다.
연애와 결혼
이 중 두 번째 단계인 끌림의 단계는 동물로 말하면 짝짓기와 같습니다. 동물들이 짝짓기를 하는 이유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데이트는 반드시 종족 번식을 위한 것이지는 않습니다. 데이트에서 단계가 끝나는 ‘연애’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그자식도 자식을 낳는 ‘결혼’은 범주가 완전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 남녀간의 사랑을 ‘연애’라고 말할 때는 갈망과 끌림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고, 관계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애착의 단계는연애와는 다른 무엇입니다. 조선시대에 갑돌이와 갑순이가 만나 연애를 했지만 결혼까지 한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조선시대 갑돌이와 갑순이의 연애는 비공식적이고 음성적인 것이었습니다. 현대의 연애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연애가 양성화되고 하나의 산업이 되었습니다. 오늘부로 전 지구상에 ‘데이트’라는 문화가 모종의 이유로 완전히 금지된다고 하면 ‘데이트 산업’ 종사자들은 폭삭 망하는 겁니다. 카페, 식당, 극장, 숙박업 등이지요. 현대에는 연애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한 축입니다.
정情 은 정서적 소유다
연애를 하면서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몸에서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은 마약 중독자의 뇌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사랑에 빠지면 사랑에 중독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실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것은 마약을 끊는 것과같지요. 반면 ‘정’이라고 말하는 서로간의 유대감, 친밀감 같은 것을 활성화시키는 호르몬은 옥시토신입니다. 연애와 정은 분비되는 호르몬이 다를 만큼 서로 다른 영역입니다.
정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호칭이 있습니다. ‘당신’입니다. 부부간에 여보, 당신 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여보라고 할 때는 두 사람이 애착 관계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당신이라고 할 때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당신이라는 표현은 2인칭입니다. 내가 아니라 타인을 표현하는 말이지요. 서로 동등한 입장일 때는 ‘너’라고 이야기하고 ‘자네’라고 할때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우해주는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반대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존칭할 때는 어떤 말을 씁니까? 잘 생각나지않습니다. 대부분 윗사람의 직책이나 성함, 소속으로 둘러 표현하지요.
여기에서 부부간에 사용하는 당신이라는 말의 묘한 뉘앙스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말을 쓸 때는 두 사람간에 모종의 긴밀함이있어서 정서적으로 서로를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당신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가 나의 사람이라는 소유의개념을 포함합니다.
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애착은 무엇일까요?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형성된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상대방이 나를 좋다고 하니까 만나기는 하는데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지사랑하지 않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것 같다는 확신이 들면 사랑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등을 돌릴 때 그 사람만은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말입니다. 만일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 사람은 전적으로 내 편일 것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정은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소유하는 겁니다.
물론 그 과정은 지난할 겁니다. 끌림의 단계에서 정(애착)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가까이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연애의 과정을 거칠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같이 있다 보니 그런 감정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도파민이 분비되어서 불같이 타오르는 낭만적인 사랑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양육 기간
결혼한 분들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부부는 의리다.’ 왜일까요? 왜 동물과 달리 인간들에게는 정이라는 감정이 강조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오랜 시간 자식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의 새끼는 아무리 길어도 2년이면 성체가 되어 독립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2년간 하루라도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생존이 위험하고, 최소 10살까지는 보호자가 있어야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없어요.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먹고 살기 위해 최소 20대 중반까지는 누군가의 돌봄 혹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인간들은 부모가 자식을 보살펴야 하는 시간이 동물에 비해 엄청나게 길고, 사회가 발전할 수록 더 길어집니다. 20년 이상 부모라는 관계 속에서 자식을 챙겨주려면 의리 이상의 끈끈한 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있어서 인간들이 동물보다 정을 유독강조하는 이유는 육아를 오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은 이렇게 긴 육아 기간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영장류의 진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장류의 조상들은 가장 먼저 정글 숲 속에서 원숭이처럼 나무 사이를 다니면서 과일과 열매를 따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몇만 년에 걸쳐서 기후변화가 일어난 끝에 숲이 초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처럼 나무 사이를 다니면서 채집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곤충도 먹어야 하고 토끼, 돼지, 사슴 같은 동물들을 사냥해야 하지요.
자연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발톱과 엄청나게 좋은 시력이 필요합니다. 순간적으로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심혈관이좋아야 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근육이 필요하죠. 그런데 우리 인간의 몸을 단기간에 이렇게 바꿀 수 없으니 머리를 발전시키는쪽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제 발로 뛰어다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자기 발로 걸으려면 최소 10개월은 걸립니다. 원래는 다 만들어서 출산을 해야 정상인데 반만 만들어진 상태로 출산을 합니다. 뇌를 덜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은 후에 덜 만들어진 부분을 추후에 학습을통해 완성하는 것이지요. 본능대로 살지 않고 학습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새로운 생존전략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인간의 육아 기간이 길어진 데는 이런 이유가 있고, 육아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부부의 정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젊은 친구들의 연애 상담을 봅시다. 젊은 여성들의 고민 중 일부는 이런 것입니다. ‘나는 연애를 진득하니 오래 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남자가 좀 소원하다 싶으면 차이기 전에 내가 차버린다.’ 스쳐가는 연애보다 진득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말은정확하게 표현하면 연애보다는 오랜 기간 공동육아를 할 만큼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반면 젊은 남성들의 경우에는 육아보다는 짝짓기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과 여의 영역과 관심이 어긋나 있기 때문에 ‘사랑’이나 ‘연애’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겁니다.
연애 / 결혼 안 하는 시대
요즘 젊은 남녀들, 여러분의 아들 딸들이 나이를 먹어도 결혼을 안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우리 애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인물이 빠지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처지는 것도 아닌데 왜 연애를 못 하고 결혼을 안 하냐’는 답답함이 생깁니다. 당최 젊은 사람들 생각을 모르겠고 말입니다. 이런 현상을 다른 각도로 생각해봅시다.
첫째, 우리 사회는 결혼을 권장하는 사회가 아니라 연애를 강요하는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쓰리고 권장합니다. 연애는 돈이 됩니다. 차 마시고 커피 마시고 영화 보고 여행 다니고 여기저기 돈을 씁니다. 광고에서 좋은 옷을 선전하고 멋진 차를 타라고 하는 것이 왜 그러는 겁니까? 돈을 써서 더 잘 보이게 해서 연애를 하라는 것 아닙니까. 결혼해서, 정착해서, 알토란 같이 아끼고 아껴서 가정을 잘 꾸리라고 권장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둘째, 우리 사회가 잘 살수록, 삶이 풍요로워질수록 결혼에 골인하기 위한 진입장벽이 높아집니다. 결혼을 하면 갖춰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결혼 준비에 올인할 바에는 나 혼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겠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 자체가 결혼으로부터 젊은이들을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성세대들의 화살과 눈총은 청년들 개인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결코 그 사람들을 탓할 수 없습니다. 연애와 소비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나 문화를 바꿔 나가야 할 필요가 있고, 결혼의 진입장벽 역시 낮춰야 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결혼 당사자만 아니라 부모도 허리가 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에 걸쳐서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연애와 사랑, 또 연애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법문을 듣는 여러분은 가정을 꾸려가는 과정에서 웬만한 고비들은 다 넘기고 노년에 이른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외 두 분이 그야말로 홀가분하게 알콩달콩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미운 정보다는 고운 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