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말은 불교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말입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워낙 유명한 말이고, 90년대에 법정스님이 번역하면서 대중적으로 상당히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숫타니파타>는 최초의 경전이니까 부처님이 직접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부처님이 굳이 ‘혼자서 가라’는 말을 안 해도 지금 우리나라는 1인 가구가 대세입니다. 우리가 상징적으로 생각할 때 일체유심조,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 이런 이야기는 일상생활하고는 좀 다른범위인 것 같습니다. 불교적인 이야기는 사회적인이야기와 별개로 생각하는데 세상 일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이야기를 심층 분석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나 혼자 사는 시대
2019년 기준 우리나라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0.2%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1인 세대주인 경우는 38%나 됩니다. 이게 무슨이야기냐 하면요. 지금 우리나라 가구의 가장 주도적인 형태가 1인 가구라는 말이에요. 얼핏 생각하면 혼자 나가서 사는 젊은친구들이 많은 것 같지만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인 나이 많은 1인 가구도 상당히 많습니다.
남녀 성비를 따져보면 남자들은 30대, 20대 1인 가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여자들은 영감님 먼저 보내고 나이 드셔서 혼자사는 여성들이 많다고 통계에 나옵니다. 또 우리 지역 전라남도가 70대 1인 가구가 제일 많은 지역 1위라고 나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저는 절에 있으면서 이러한 현실을 직접 피부로 경험했습니다. 밑에 마을을 보면 초등학교를 짓기도 하고 마을 규모가 제법 큰데도 실제 사는 사람은 17가구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 가구들 조차도 다 1인 가구이고, 다 할머니들입니다. 사는 집보다 빈집이 더 많아요. 할머니 혼자 사시고요.
봄 여름 가을에 일이 많을 때는 이 할머니들이 아침부터 나가셔서 일을 하시는데 겨울에는 일이 별로 없어요. 공공근로도 매번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겨울철이 되면 오전 9~10시쯤 마을회관으로 모입니다. 모여서 이야기 하고 고스톱 치고 놀다가 밥을같이 해먹어요. 밥먹고 나면 또 고도리 치고 텔레비전도 보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4시쯤 되면 각자 집에 갑니다. 이런 시기에 절에서 재 지내고 과일이 좀 남았다 그러면 고민할 일이 없습니다. 마을회관에 갖다 드리면 일일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드릴필요가 없습니다.
1인 가구가 대세가 된 세상
우리나라에서 1인 가구가 대세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가정이 붕괴되었다는 겁니다. 결혼을 안 하는 사람들, 못 하는사람들, 생각이 없는 사람들, 결혼을 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혼했거나 배우자가 먼저 죽어 혼자가 되는 경우 모두 가정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겁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붕괴되고 습니다. 흥망성쇠로 따지면 가족이라는 개념이 한참 성장하고 발전하고 그러다가 지금은 노쇠해가지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지경입니다. 1인 가구, 더 넓게 보았을 때 1인 세대주가 우리나라의 40%에 육박한다는 것은 혼자 사는 사람이 우리사회에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처님은 이미 2,500년 전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혼자 살라고요. 부처님은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도 출가를 시켰습니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자식 이름을 ‘내 출가를 가로막는 장애’라 지어놓고 결국은 출가까지 시키겠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자식을 출가시킬 정도로 혼자 사는 것을 강조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과연 2,500년 전에 “앞으로는 인간들에게 가정이라는 틀이 무의미해져서 혼자 살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혼자 살아라.”라고 이야기를 했는가? 그것은 아니겠죠.
현대인이 혼자 사는 것과 부처님 당시 사람들이 혼자 살았던 것은 맥락이 다릅니다. 설마 부처님이 <나 혼자 산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살라고 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혼자 살아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2400년 정도까지. 20세기까지만 해도 인간들은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게 당연했습니다. 어느 세계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다 가정을 이루고 살았어요. 그런데 20세기가 저무는 시점부터 가정이 붕괴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닙니다. 좀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에서는 1인 가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비유를 들자면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들처럼, 인간들이 각각의 섬처럼 흩어져있는 거예요. 각각 따로 놀아요.
혼자 사는 사람들 생각을 해봅시다. 혼자 일어나서 혼자 씻고 혼자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해서 밥 먹고 텔레비전 보다가 자요. 요즘 사람들의 10명 중 3명은 이러고 삽니다. 그 사람들이 마치 망망대해에 뿌려진 섬들처럼 흩어져 있다는 겁니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이런 현상들을 놓고 ‘현대인들은 소외되었다.’ ‘흩어져서 홀로 외로이 살아가고 있다. 이게 우리 모습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일요일 산행을 했습니다. 보통 버스 종점에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일요일은 사람이 많은데 땡볕에 걸으면 힘드니까 숲속으로 가야되겠다 해서 코스를 바꿔보았습니다. 증심사 바로 옆에 사람들이 거의 안다니는 길이 있는데요. 그게 토끼등까지 가는 제일 짧은 길입니다. 일요일도 불구하고 사람을 한명도 안 만났어요. 숲이 울창하고, 길 끝에 정자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토끼등입니다. 그 정자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막길을 가기 힘드니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바위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요.
혼자라서 정말 좋다!
‘혼자가 참 좋구나.’ 내가 생각해도 참 황당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잘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곰곰 생각해보니까 나무라던가 숲이라던가 그늘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줬으니까 참 좋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습니다.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과연 내가 그날 바위에 앉아 쉬면서 기분이 그렇게 좋았을까? 그렇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것들이 있었으니까 내 안에 충만감이 가득 찬 게 아닌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 사회는 망망대해입니다. 우리 개인들은 마치 잉크처럼, 무인도나 섬처럼 흩어져 있는데 만약에 물을 한번 쫙 빼보면 어떻게 됩니까. 무수히 많은 섬들은 다 하나의 육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서해는 불과 만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였답니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났을때가 만몇 년 전이였는데 그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바다가 된거죠. 중국과 우리나라도 하나의 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물이 다 빠지면 모두가 섬이 아니고 하나의 육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바다 위에 흩어져서 고립되어 있는 외로운 섬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다른 존재들이 존재함으로써 내가 혼자서 존재를 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산행에서 내가 느꼈던 충만함도 ‘아 내가 혼자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그것이 어떤 감동으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숫타니파타>의 예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문장은 앞이 생략된 문장입니다. 전문은 이렇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자처럼 바람처럼 연꽃처럼 무소의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자는 어떠한가?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소리에 놀라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소리에 놀라는 건 어떤 겁니까. 예를들어 토끼 사슴 이런 동물들은 작은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경계합니다. 소리에 놀라서 도망갑니다. 그런데 사자는 그런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왜 사슴이나 토끼는 작은소리에 놀라지만 사자는 그렇지 않은가. 이유는 쉽습니다. 토끼나 사슴같은 존재들은 그 소리를 내는 존재가 자기 목숨을 위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리에 놀라요.
그런데 사자는 그 소리를 내는 존재가 자기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면 자기는 동물의 왕이니까요. 자기가 최고니까, 자기가 강하니까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소리에 놀라는 존재는 불안한 존재 두려운 존재 강하지 못한 존재 마음이약한 존재입니다. 반면 사자는 강한 존재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자처럼 강인한 송곳니와 튼튼한 근육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강한 존재는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사자처럼 혼자서 가라는 이야기는 주변의 상황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강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 1인 가구로 혼자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속받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그물에 걸리지않는 바람처럼’. 바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갈 수가 있습니다. 자유로운 존재죠. 바람은 자유의 상징이자 가장 주체적인 것입니다. 얽매이지 않고 붙잡히지 않습니다. 구속되지 않아요.
왜냐? 자기 자신이 집착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뭔가에 애착을 가지거나 내지는 누군가가 자기를 애착하거나 집착하지않으니까 바람처럼 자유로운 거죠. 그런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고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서 새도 바람처럼 어디든지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는 그물에 걸려요. 자기 몸뚱아리가 있으니까요. 그게 뭡니까? 집착입니다. 바람이라는 것은 애착이나 집착을 털어낸 존재를 상징합니다. 집착하지 말고 애착을 가지지 말고 살아라 이 말입니다.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엄밀하게 따지면 연꽃 자체가 진흙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연꽃을 보면 연잎은100% 방수가 됩니다. 비가 오면 물방울이 가운데로 모였다가 어느정도 차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여기에서는 연꽃이 진흙속에서 고귀하고 청정하게 꽃을 피우는 속성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은 연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바람이 집착과 애착을 가지지 않는 존재라면 연꽃은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존재를 말합니다. 욕망에 대해서 자유로우면 비록 내가 중생들이 살고 있는 욕망으로 가득찬 사바세계에 살고있어도 청정한 하나의 꽃처럼,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우면요.
홀로 사는 세 가지 덕목
이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부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은 마음이 건강해야합니다. 사자가 소리에 놀라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애착이나 집착이 없는 존재가 바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가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욕망의 뿌리를 뽑아낸 존재, 그래서 아무리 욕망의 진흙탕 속에 있어도 청정한 연꽃을 피워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바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것은 단순한 비유일까요? 아닙니다. 부처님은 자식까지 출가시킨사람이에요. 석가족의 왕자로 하도 석가족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서 출가를 하니까 석가족의 왕이 부처님에게 제발 사람들을 그만 출가 시키라고 간청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부처님은 혼자 사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생들은 함께 있으면 마음의 건강과 애착과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혼자서 가는게 좋다, 혼자서 수행하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부처님이 비유적으로 한 말이 아니고 실제로 가능하면 출가해서 홀로 나무 아래서 열심히 수행하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돌아봅시다. 부처님 당시 2500년 전에는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게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그렇지 않습니다. 홀로 살아가는 게 대세가 된 세상입니다. 부철님이 말을 안해도 각자 알아서 혼자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도, 몸은 한집에 같이살지만 마음은 구만팔천 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부만의 이야기가아닙니다. 자식도 그렇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문 딱 닫고 다음 날 아침 먹을 때까지 얼굴도 못 보잖아요. 그게 같이 사는겁니까? 지금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같이 있음을 경계하는 이유
얼마 전 서울에서 월간 <증심> 편집하는 분들이 내려왔습니다. 좋은 곳을 알려주고 싶어서 담양에 갔는데요. 가서 보니까 옛날에 한 번 왔었던 곳 같더군요. 기억이 오락가락 했어요. 이번에 갔을 땐 일요일이었는데 마치 80년대 9시 뉴스에 나오는 전형적인 유원지의 풍경과 같았습니다. 한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오리배가 떠있고 옆으로는 큰 나무들이 줄지어 있고 그 주위로허술한 가게들이 쫙 펼쳐져 있는 게 무슨 80, 90년대 유원지에 놀러온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그 길을 혼자 갔었더라면 어땠을까? 상당히 아마 어색했을 겁니다. 거기서는 연인들 친척들 가족들이어울려서 느긋하게 평상에서 국수도 먹고 하더라고요. 그런 자리에 저 혼자 뻘쭘하게 있으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우리 인간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에요. 그게 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살아가는 행복이지 않겠습니까. 가족들끼리 굳이 무슨 이야기를 안 해도 일요일 오후 시간을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마음 편하게 쉬다 오는 것. 이게 사람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부처님은 그런것들에 대해서 경계를 했는가 이겁니다. 결코 나쁜 게 아닌데, 왜 경계를 하셨을까? 가족이라던가 친구라던가 물건이라던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마음을 뺏기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좋은데 하루 24시간 365일 그런 기분으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다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 마음이 즐겁고 편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내 마음 밖으로 나가는 것을 경계한 겁니다.
내 마음 밖에 끌려다니지 않기
사자처럼 바람처럼 연꽃처럼 살라는 말을 한 마디로 줄이면 내 마음 밖의 것에 마음을 뻿기지 말고 내 마음을 돌이켜 보라는 말입니다. 왜 사자가 강한가? 왜 소리에 놀라지 않는가? 소리가 나면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소리를 듣는 내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니까 그 소리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겁니다.
왜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가? 애정하고 사랑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그물을 바라보는 내 마음을 관찰하니까얽매이지 않습니다. 장성한 자식을 대할 때도 품 안의 자식이라고 걱정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못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밖에 나가면 다 알아서 잘 삽니다. 왜 걱정을 하는가? 내 자식이니까 걱정을 해요. 내 자신이 집착을 하는 거예요. 애착을 가지니까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고 자식한테 가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자식한테 가있으니 자식들 행동 하나하나에 내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을 보면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불안한 겁니다.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도 같은 맥락입니다. 왜 연꽃은 왜 청정한가? 욕망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도 마음은 내 자신을 향하고 있으니까 그런 욕망에 마음이 오염되지 않는 겁니다. 반면 마음이 욕망에 끌려다니면 마음이 욕망 그 자체가 되는 거죠. 차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차를 볼 때마다 차를 바꾸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겁니다. 그건 욕망에 끌려다니는 거예요. 왜 끌려다니는가? 내 마음을 차분하게 들여다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 1인 가구가 지향할 점
정리를 하자면 무소에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한 이야기는 첫 번째, 말 그대로 가능하면 어울리지 말고 혼자서 열심히 수행을 하는 말이고요. 두 번째, 본질적으로 자기 마음의 친구는 오직 자기 마음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경치나 자식이나 비싼 물건, 좋은 것들에 마음을 뺏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사바세계에서 살아가는데 번뇌가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항상 내 마음과 벗이 되어서 살아가라, 내 마음을 항상 들여다보고 살라는 이야깁니다.
우리 시대에 물리적으로는 대부분 사람들이 1인 가구로 혼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가 못해요. 혼자서 유튜브 보고 홈쇼핑 보고 드라마 보고. 마음이 계속 밖에 나가 있습니다. 이거는 혼자서 가는 게 아니에요.
‘간다’는 말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존재하는 그 자체가 아니고 뭔가를 하라는 거예요.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치 코뿔소의 뿔이 딱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굳건하고 강하게, 혼자서 네 갈 길을 가라라고,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지 단순히 혼자서 살라고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자의 반 타의 반 혼자 사는 시대에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과 협동하여 살아가는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