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 5
8.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전문]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라.
베푼 덕에 대해 보답을 바라게 되면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도모하는 생각이 있게 되면 반드시 화려한 명예를 드날리고자 하느니라.
덕의 본성이 없음을 밝히고 덕이 영원하지 않음을 관조할지니,
덕이란 참 알맹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신짝 버리듯이 하라’ 하셨느니라.
9.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되리라” 하셨느니라.
[전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을 바람이 분에 넘치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을 치고,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을 치면 반드시 추악한 이익 때문에 자신을 훼손시키느니라.
세상의 이익이란 본래 공(空)한 것!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면 번뇌만 커지나니, 이익을 허망되이 구하지 말지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이익을 멀리하는 것으로 부귀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10.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전문] 억울함을 당하여 거듭거듭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자꾸만 밝히고자 하면 상대와 나를 잊지 못하고,
상대와 나를 두게 되면 반드시 원한이 무성하게 자라느니라.
억울함을 받아들여 능히 참고 용서하라.
참고 용서하면 겸허하게 바뀌나니, 억울한 일이 어찌 나를 상하게 할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행의 문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의 공식
이번 시간에는 보왕삼매론의 마지막 세 가지 경구를 살펴봅니다. 공덕을 베풀 때 과보를 바라지 말고,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고, 억울한 일을 당해서 그것을 밝히려고 하지말라는 내용입니다.
보왕삼매론의 공식이 무엇입니까? 어떤 장애를 만나면 중생들은 그 장애를 피하려고 하나, 그 장애를 피하려고 하면 내 마음에 장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인연법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장애의 공한 이치를 깨달아 장애가 장애 아닌 줄 알면 마음의 장애가 사라집니다.
이 공식에 맞춰 오늘의 세 구절을 강독하겠습니다.
무주상보시는 자연적 현상
공덕을 베풀 때 과보 없음을 피하려고 하면 반드시 내 안에 명예심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과보 없음이란 무엇일까요? 무주상보시입니다. 자연이 무언가를 바라고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듯, 베푸는 것도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무주상보시가 자연입니다.
인연법이 원래 그러한데 우리는 굳이 그것을 피해서 과보를 바랍니다. 장애를 피하는 데에서 마음의 장애가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명예를 얻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명예를 얻는 것을 왜 장애라고 하나요? 주변에서 나를 존경하고 흠모하고 깍듯이 대하면 당장은 기분이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왜나하면 영원히 그들로부터 똑같은 수준의 존경을 받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주변에서 나를 존경하는 모습이 달라지거나 조금이라도 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마음에 고통이 생깁니다.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도 살펴보겠습니다. 남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덕(德)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을 베풀려면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덕이란 무엇일까요? 덕 앞에 공(功)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공덕은 내가 공을 들인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이 공덕입니다. 이것을 덕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입니다. 흔히 누군가 공덕을 베푼다고 할 때 그 사람을 인자하고 관용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노력해 얻은 것을 막 퍼주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베풀 때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장애
그렇데 막상 내가 덕을 베풀려고 하면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 그러냐면요, 실은 내가 노력해서 쌓아놓은 공덕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 내 뒤주에 쌀이 별로 없는데 남에게 주려고 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속으로는 벌벌 떨릴 것입니다. 그런데 내 뒤주에 쌀이 가득 차있다면 한 바가지 퍼주는 것 쯤 아무렇지도 않지요.
한편 덕을 베푼다, 무언가를 베푼다고 할 때 물질적인 것을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물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모두가 존재합니다. 보시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베풀 수도 있고 물질적이지 않은 것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비물질적인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권력, 명예, 사랑, 정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도 무주상보시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실상 무주상보시를 하기에 너무 어려운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만큼 주는 동시에 바라는 마음이 큰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크고 나면 항상 섭섭한 마음이 들지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오직 너를 염려하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 하는 말들, 익숙하시지요? 사랑이고 부모의 마음이라 포장하지만 실은 명예욕입니다.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남녀 사이의 사랑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나만큼 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바라는 바 없이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에게 사랑을 내놔,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지요. 사랑하니까 구속하고, 사랑하니까 단속합니다. 이것은 사랑을 무주상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다른 바라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바라는 마음은 공덕이 부족한 데서 나온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중생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내 안에 쌓아놓은 공덕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음의 장애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덕을 베풀 때 중생들이 느끼는 장애는 바라는 바 없이 베푸는 마음, 즉 무주상보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애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입니다. 인연법에 따르면 베푸는 것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는 것을 알고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평소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얼마나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홉 번째 경구에서는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중생 앞에는 무주상보시라는 장애가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무주상보시를 피해 무언가를 과하게 바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마음속에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치는 장애가 발생합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무명(無明)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근본입니다. 무언가를 탐내는 마음, 화내고 분노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어리석은 마음 역시 깊어집니다. 탐진치 삼독은 함께 깊어집니다. 이익을 많이 바라는 것은 탐심이 나를 지배한 것이고, 거기에서 어리석은 마음도 덩달아 요동을 칩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심은 기본이고요,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심도 주의해야 합니다. 사랑이 깊어져서 애착이 되고 집착이 됩니다. 너무 많이 사랑하는데 내가 바라는 만큼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면 화가 납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을 유독 미워한다면 그 사람이 내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가 채워주지 않으니까 미운 거예요.
세상의 이익이란 본래 공(空)한 것이며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면 번뇌만 커진다는 것을 통찰하면 베풀면서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덕을 쌓으면 바라는 바 없어진다
모든 문제들의 출발점은 공덕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공덕을 쌓았는가에 있어요. 공덕을 많이 쌓아놓고 있으면 바라는 게 별로 없습니다. 바라는 게 없으니 탐진치 삼독도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공덕은 어떻게 쌓아야 할까요? 선업으로 쌓은 결과물을 가지고 보시하면 그 보시가 공덕으로 돌아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천 사람이 10만의 보화로 재를 올려도 그러한 보시는 가난한 사람의 아주 조금의 보시보다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정하게 살면서 누군가를 상처내고 죽이고 괴롭혀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며 올바른 보시로써의 가치가 없다고도 하셨지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선업을 지어 스스로 만든 것으로 보시를 해야 그 보시에 공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덕을 쌓으려면 선업을 지어야 하고, 그래야지만 덕을 베풀 때 바라는 마음이 없고, 그럴 때야만 마음에 삼독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출발은 선업을 쌓는 데에 있습니다.
공덕을 쌓는 것은 청정한 삶을 사는 것
선업을 쌓는다는 말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괴로움을 두루 알기 위해서다. 괴로움을 완전히 알기 위한 길은 어떠한 것이며 그 방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다.”
팔정도입니다. 불교에서 청정함은 신구의 삼업의 청정함을 말합니다. 악업으로 인해서 생기는 번뇌를 멀리 떠난 것. 다시 말해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선업을 짓는 것이지요. 선업을 지으면 공덕을 쌓을 수 있고 공덕을 쌓으면 베풀 때에 과보를 바라는 삼독심이 생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번뇌에서 멀어져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청정한 삶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 번째 경구에서는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억울하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정신적으로 명예가 실추된 상황을 말합니다. 내가 가진 기대 수준에 주변 상황이 미치지 못할 때 억울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애정, 관심, 사랑이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억울한 심정이 됩니다. 그런데 억울함을 밝히려고 하면 원한이 자랍니다. 그러니까 억울함을 받아들이고 참고 용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주변 상황이 나를 억울하게 만든다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번 생에 내가 남을 참 힘들게 하고 상처주는 일들이 많았구나. 그 과보를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겸허히 수용하는 데에서 청정한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라
보왕삼매론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묘협스님이 당부합니다.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이것이 장애다 생각하면 내 마음의 장애는 더 커질 것이고, 오히려 장애 가운데서 인연법과 연기실상의 세계, 즉 공(空)함을 알면 그 속에서 보리도를 깨닫게 된다는, 보왕삼매론의 공식입니다.
이 부분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結)
이와 같이 막히는데서 도리어 통하고 통함을 구하게 되면 도리어 막히나니
바로 장애 속에서 모든 오묘한 경지를 이루게 되느니라.
여래께서는 장애 가운데에서 보리도를 얻었을 뿐아니라,
앙굴마라와 제바달다의 무리가 반역되는 짓을 하였으나
그들에게 수기를 주고 교화하여 성불토록 하셨느니라.
어찌 저 거역되는 것들을 나의 순리로 삼지 않을 것이며
어찌 저들의 훼방이 나의 성취가 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시절이 각박하고 세상이 악하여 인생살이가 이상하게 흐르거늘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 하여 어찌 장애가 없겠는가.
만약 먼저 장애에 머물러 보지 않으면,
장애가 다다랐을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하여 법왕의 큰 보배를 이로 인해 잃게 되리니,
이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랴.
장애가 다가오면 오히려 반기고, 이것을 법왕의 큰 보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라는 당부입니다.
지금까지 다섯 시간에 걸쳐 보왕삼매론을 공부했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내용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며, 가까이에 두고 수시로 들춰보는 것입니다. 이 같은 내용을 불자로써 올바른 삶을 사는 지침으로 삼고 마음에 새기려는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