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빈소를 차리자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오면 느낀 삶과 죽음.
누군가 돌아가셔서 조문을 다녀오게 되는 일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조문은 관례화된 의식이다. 조의금을 준비하고 영정에 절을 하고 유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지인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돌아가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은 고작 2~3분 남짓이다.
내가 고인의 입장이 되어 나의 빈소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나는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유족들이나 조문객들에게도 더이상 나는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삶은 1인극 판토마임과 같아서, 타인은 나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짐작할 뿐, 나와 완벽하게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못한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끝나듯, 삶이 끝나면 세상과 타인에게서 나는 사라지고 그 관계 역시 끊어진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 무아이다. 무명으로 가득 찬 아상을 털어내고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잘 죽는 길이며, 불교를 제대로 실천하는 길이다.

인연 따라 사는 방법 (feat. 법정스님)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내 안에서 발견한 순수한 욕망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스릴 것인가?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알아보는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방법.
마음이 좋고 싫음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이 감정에 대해 분별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 그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를 바라며 집착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말라’고 하니 마음이 괴롭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할뿐 아니라 서로의 의지함으로써 무언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할 뿐 자성은 없으니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즉 무명에서 벗어나야 연기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움직인다. 때문에 변하지 말라고 집착할 일이 아니라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지혜롭게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다.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1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을 통해 알아보는 수행자의 덕목.
스님(중)은 성직자, 수행자, 생활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경허선사의 ‘중노릇’의 대상은 수행자로서의 스님이다. 스님뿐만 아니라 수행하며 살겠다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허스님이 말하는 중노릇을 삶의 태도로 체화해야 한다.
왜 수행자로 살아야 하는가?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내가 없음을, 삶도 죽음도 없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가 아님을 알고, 모든 것이 그물코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은 전생과 이생, 내생 역시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찾아야 하며, 마음을 찾고자 하는 자는 수행해야 한다.

봄비 2

신라시대 골품제에 부딪쳐 좌절한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은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 ‘추야우중’을 썼다. 이 시는 흔히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해석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이 묻어난다.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것은 중생들이 가지는 가장 큰 병인 무명, 즉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은 중국의 시성 두보의 시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은 70년대 참여시인 김지하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각국사 혜심스님은 이렇게 무명에 젖어 있는 중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비가 내리는데 어디를 쏘다니느라고 쓸 데 없는 노력을 하는가?” 라고. 스님은 장대비가 쏟아지면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올 때는 가만히 앉아 그물코처럼 연결된 인드라망을 떠올리자. 그 화두에 골몰해보자.

봄비 1

비가 오면 감상에 젖어든다. 지나간 옛 인연을 떠올리기도 하고 괜스레 울적한 심상이 되기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내리는 봄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국의 시성 두보는 ‘춘야희우’라는 시에서 비가 내리는 정취를 묘사하면서도 아직 버리지 못한 사대부의 꿈, 즉 중생심을 드러낸다.
반면 진각국사 혜심스님은 내리는 보슬비를 보며 딴 생각 피우지 말고 연기실상의 이치를 깨닫도록 노력하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알듯말듯한 연기실상의 세계. 진리. 오로지 그 생각만 하는 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며,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아모르파티(Amor fati)

흔히 처세술에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곧 목적이다.”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그러나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이 괴로운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만 하는 우리네 삶에 대입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서양의 근대 철학자 니체의 말이자, 트로트 가수 김연자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세를 탄 “아모르 파티”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다. 니체는 인간의 삶이 윤회로써 계속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을 펼쳤다. 이는 불교의 무시무종과도 닮아 있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고 원칙이다. 목표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 순간순간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원효스님이 유학을 포기한 이유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기로 한 이유는 ‘원효대사 해골물’이라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에서 기인했다.
깜깜한 밤에 마신 감로수가 알고 보니 해골물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한 일체유심조. 흔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표현하는 일체유심조의 참 뜻은 “세상은 마음이라는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 같다”는 화엄경의 진리와 같은 것이다.
원효스님이 깨달은 것은 중생들이 칠흑같은 무명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무명에서 벗어나면 실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그린 그림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 곧 실상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며,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화두이다.
욕망에 마음을 뺏겨 마음이 그린 대로 세상을 보지 말고, 실상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해야만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갈 수 있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5

오온은 무엇인가? 흔히 ‘색수상행식’이라고 답한다. 답을 할 때, 불교의 교리를 일반적인 지식이나 실용 논리로써 인식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는지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온은 단지 색수상행식이 어떤 것이다 하는 지식이 아닌 나라는 존재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는 것을 통찰하기 위해 나를 해체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오온은 곧 ‘나’다. 세상에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나’가 실은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일 뿐 다섯 가지 무더기가 모여있는 것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온을 통해 아공과 법공을 깨달으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염오의 과정이며, 염오의 과정으로 내 안에 쌓여있던 탐욕이 빛바래는 과정을 거쳐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
오온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며, 수행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4

사성제는 불교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부처님이 불교란 무엇인지 1분 요약으로 설명한 것이다. 당시 인도사회의 보편화된 개념이었던 열반을 주제로 어떻게 열반에 이를 것인가를 이야기한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의 키워드를 ‘괴로움’으로 삼았다. 열반이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성제의 전반부에서 괴로움이 무엇인지, 왜 괴로운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서 열반이 무엇이다는 것을 괴로움의 소멸로 정의하고, 소멸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한다.
불교의 핵심은 괴로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개념을 해체하는 것을 통해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것이다.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3

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써의 법(담마)이요, 둘째는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써의 법(다르마)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의미의 법이다. 존재의 기본 단위로써의 법은 또한 두가지 성질로 나뉘는데, 먼저는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고, 이어서는 그러한 고유성질을 유지하는 최소단위인 찰나이다.
우리가 현실에 실제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고유성질로 해체할 수 있으니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아공이다. 또한 법은 찰나생 찰나멸이기에 무상하고 이는 법공을 의미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아공과 법공을 공히 성찰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