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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종교란 무엇인가?

현대인들이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나’라는 존재 그 자체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답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답이 없으니까 고민을 한다. 이 말을 서양철학자들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표현했다.
나라는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에서 고민과 불안이 나온다. 이런 근본적인 오류를 위로하기 위해 종교가 등장했다. 신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고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위로한다.
불교는 신을 상정하지 않고 스스로 수행을 통해 고통의 완전한 종식에 이르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종교면서 종교가 아닌 종교다. 세상 모든 일이 신의 뜻이 아니라 연기임을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수행해야한다는 것의 불교라는 종교의 핵심이다.

원효스님이 유학을 포기한 이유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기로 한 이유는 ‘원효대사 해골물’이라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에서 기인했다.
깜깜한 밤에 마신 감로수가 알고 보니 해골물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한 일체유심조. 흔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표현하는 일체유심조의 참 뜻은 “세상은 마음이라는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 같다”는 화엄경의 진리와 같은 것이다.
원효스님이 깨달은 것은 중생들이 칠흑같은 무명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무명에서 벗어나면 실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그린 그림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 곧 실상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며,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화두이다.
욕망에 마음을 뺏겨 마음이 그린 대로 세상을 보지 말고, 실상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해야만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갈 수 있다.

일상 속의 중도

오백전 등을 500개로 맞춰 달자는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500개로 맞추지는 못하고, 등만 새로 갈고, 기존의 오백전 등은 진입로를 장엄하는 데에 쓰기로 한 사연. 사연의 끝은 “세상 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깨달음이다.
세상 일이 왜 마음대로 안 될까? 세상 일은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나도 모르게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나의 어떠한 행동으로, 노력으로, 수고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것이 곧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이다.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있다는 진리이다. 연기의 구체적인 실천은 중도이다. 수행적 측면에서 중도는 고행과 게으름의 양 극단을 여의는 것이고,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적 측면에서의 중도는 단멸론과 상주론의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세상 일은 연기의 흐름이 만들어간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되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그러한 마음을 ‘삼국지’에서는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있는 그대로’ 말의 함정

긴 숟가락만 있는 극락과 지옥에서 극락 중생들은 서로에게 음식을 떠먹여주고 지옥 중생들은 자기 것만 먹으려다가 밥 한 톨도 먹지 못해 고통 받는다는 우화가 있다.
숟가락이 길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고통 받을 필요가 없는데 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까? 앞뒤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고요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혀야 한다. 논리, 감정, 느낌, 공상, 망상과 같은 생각과 생각 사이를 넓히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고요한 마음에 세상이 비치면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도리이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 탄생게의 진정한 의미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그를 편안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말이 실은 불교의 모든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자들도 잘 알지 못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이 세상 모두를 통틀어서 살펴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세상을 발견했다는 지혜의 영역이다. 부처님이 잘나서, 이 세상에 부처님부터 잘난 사람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라 말이다.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자비의 영역이다. 공성의 자리, 지혜의 자리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중생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마땅히 부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연민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