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전에 8 (해제)

‘영가전에’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부처님께 의지하여 삼독심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왕생을 하기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버리고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삼독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욕망하는가가 아닌 ‘무엇이’ 욕망하는가를 바로 봐야 한다.
욕망하는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욕망이 강해지고, 집착이 되고, 소유하는 마음이 커지고, 종국에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더욱 견고해진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는 수행은 죽음을 통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다.

영가전에 7

불교에서는 중생들의 삶의 형태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태어나는 찰나 ‘생유’, 임종하는 찰나 ‘사유’, 태어나 죽기까지의 인생 ‘본유’, 임종 후 다음 몸을 받기 전까지의 상태 ‘중유’ 등이다.
이 중 태어나는 순간과 임종의 순간은 아주 중요한 순간으로 정의된다. 임종하는 찰나의 마음이 다음 생유의 마음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임종하는 순간에는 육신에 대한 애착, 가족에 대한 애착 없이 오로지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 마음으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상이며 이미지라는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여남은 애착마저 다 놓고 극락세계에 가서 좋은 몸을 받아 태어나시라는 당부로 ‘영가전에’는 마무리 된다.

영가전에 6

중생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의 여섯 가지 세계를 오가며 육도윤회한다. 번뇌라는 이름의 미혹한 마음을 털어버리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뛰어넘어 극락으로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가는 우리는 누구인가? ‘영가전에’에서는 물과 얼음을 예로 들어 우리의 삶을 설명한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는 것은 인간이 육신을 갖고 태어나는 것과 같고, 인연이 다해 얼음이 녹아 사라지는 것은 육신이 죽는 것과 같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이치에 왜 인간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가? 그런 마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영가전에 5

이 생을 마치고 다음 생으로 갈 때 영가님의 발목을 잡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윤회할 때 마음에 탐, 진, 치의 삼독심이 묻어있으면 다음 생도 삼독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불국정토란 곧 청정한 마음이다. 때문에 불국정토에 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된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은 탐진치 삼독을 버리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에서 탐심과 진심이 생겨난다. 미혹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삿된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며, 삼독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반야지혜를 이루는 일이다.

영가전에 4

극락은 비행기나 차를 타고 이동해서 갈 수 있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다. 극락이란 번뇌망상이 없어져 무명업장을 벗어난 곳이다. 백중에 영가님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영가님이 삼독심을 버리고 무명업장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행위이다.
삼독심을 버리고 극락에 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상임을 깨쳐야 한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생과 사, 생과 멸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주도함을 아는 것이다. 흔히 무상을 무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찰나찰나에 생하고 멸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이 몸을 떠나 다음 생을 받는 것 역시 생멸의 자연스러운 이치임을 이해한다면 떠나는 육신과 삶에 탐진치 하지 않고 극락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영가전에 3

불교에서 말하는 ‘죄’는 탐진치 삼독이다. 내가 무엇인지 몰라서 집착하고 화를 낸다. 탐욕과 분노는 나를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무명으로 인한 악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모르고 지은 죄, 알고도 지은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죄의 실체가 본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알면 된다. 죄는 마음 따라 생겨날 뿐 그 자체로써 자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죄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는 참회를 해야 한다. 이해와 참회가 함께 갈 때 비로소 죄가 사라진다. 참회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수행과 참회는 같은 말이다.

영가전에 2

중생은 육신과 정신이 별개라는 것을 전제로로 하여 지수화풍으로 이뤄진 육신에 의지하여 한평생을 살아간다.
육신은 다만 인연에 따라 생기고 흩어질 뿐 영원한 것이 아니건만, 육신이 영원히 ‘나’일 것으로 착각하여 육신에 집착하게 된다.
‘육신=나’라는 생각은 내가 느끼는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은 다만 우리가 대상이라 생각한 것일 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이라는, 내 것이라는 집착과 소유욕을 알아차리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의 진리를 체득할 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영가전에 1

‘영가전에’는 백중날 영가들에게 읽어주는 경전이다. 과연 영가란 무엇이며 백중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불교에서는 영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3년 안에는 환생을 한다고 본다. 누군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났으면 이미 윤회하여 다른 몸을 받았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극락왕생하시라’고 기도하는 것은 누군가의 전생만을 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몸을 받아 어딘가에 살아있는 불특정한 누군가, 나아가 모든 중생을 위해서 축원하는 것이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