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비폭력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일을!’ 하고 경악하게 만드는 사건사고들이 전파를 탄다. 사회적 규칙을 어긴 죄로 사회적인 처벌을 받는 것과 별개로 범인을 향한 비방이 쏟아진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난 조건을 살펴야 한다. 그 사람에게 분노하기보다 그의 분노를 촉발한 조건에 분노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비방하는 마음자세는 무엇보다 내 안에 분노와 악의와 악업을 만들어내기에 내려놓아야 한다. 화를 내는 것은 악업이며 악업은 반드시 고통이라는 과보를 동반한다.
같은 조건에 놓여있더라도 내 안에 악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과로써의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악업을 키우는 대신 자비의 마음을 키우는 불자가 되자.

진정한 용기

광주항쟁, 최후의 11인인 김동수 열사 추모재에 즈음하여 생각하는 진정한 용기.
진정한 용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보살의 용기와 중생의 용기다.
보살의 용기는 자비심에서 비ㄹㅅ된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는 마음에서 자비심이 나오며, 공과 지혜에 대한 통찰에서 자비가 나온다.
중생으로서의 용기는 마음의 무게와 반비례한다. 마음의 애착과 욕심을 버릴 때 용기 있는 행동이 나온다.
늘 마음의 때를 털어내는 일상을 보낼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 안의 수행이 되어 보살심으로 깃들 것이다.

인생의 고통과 행복

왜 중생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가? 고통은 일종의 신호이다. 화, 우울, 두려움, 불안함, 짜증 등의 고통의 감정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과연 고통의 신호를 받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고통을 회피하거나 무시해서는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없애야만 고통의 보상으로써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고통은 우리 안에 있는 나 밖에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즉 중생이 보낸다. 중생이 보내는 신호를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중생의 길이다. 지혜로운 중생의 길을 보다 발전시킬 때 지혜로운 수행자의 길, 지혜로운 부처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삶의 기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길 잃은 산행 경험에서 비추어보는 올바른 인생의 기준.
잘못된 길을 갈 때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가 잘못 가고는줄 모르고 가는 경우. 둘째, 올바른 길의 안내자가 없는 경우. 셋째, 올바른 길에 대한 절실함이 없는 경우. 넷째, 지금 있는 곳을 성찰하지 않는 경우.
바꿔 말하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과, 그 승이 제시한 길에 대한 믿음 혹은 간절함과,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우리를 ‘행복’이라는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공감하는 마음

새해를 맞이하며 전하는 덕담.
인간은 이기적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마음이 솟아난다. 그런가하면 잘 모르는 상황에는 오해와 편견에서 이기적인 생각이 피어오르는 때도 있다.
그러나 오해가 걷히고 오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면, 미안함에서 다시 공감의 마음이 생겨나고는 한다. 사소한 계기일지라도 배려심과 자비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끔은 나를 위한 기도, 내 가족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남을 위하는 기도, 모두를 위한 기도를 하도록 하자.

다시 생각하는 ‘개미와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겨울을 대비할 수 있고 베짱이처럼 놀고 먹으면 겨울이 왔을 때 고생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솝우화다. 그러나 이 교훈이 꼭 현대사회의 현실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 우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개미처럼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 베짱이처럼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삼세가 있고 내가 있다는 무명에서 벗어나며, 다만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내가 모두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무언가를 할 때 행복해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과 애착이 생긴다. 애착이 굳어지면 소유욕이 된다. 사랑을 이유로 소유 심리가 생겨난다.
불안한 마음은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내 것’ 이라는 소유는 증표가 없다. 단지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가족에게만 그러한가? 다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유물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사진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에게서 불안이 생겨난다.
나에 대한 애착, 생존에 대한 애착을 버릴 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원망하는 마음

미운 마음이 커지면 원망이 되고, 원망이 커지면 원한이 되고, 원한이 사무치면 저주를 품는다.
원망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힘든 원인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있다는 전제로 원망은 자라난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남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여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고 통제하는 것은 부처님도 못(안) 하는 일이다.
<뚱보 비구의 일화>와 <뚱보 비구의 전생담>에 비추어 원망하는 마음의 근원을 찾아본다.

그랬구나

미움과 증오로 휩싸인 번뇌의 불꽃을 끄는 주문은 “그랬구나~”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프레임은 다른 관점 혹은 입장에 의해 다르게 짜여진다.
일어난 현상과 내 마음을 또렷하게 관찰해야만 나의 입장과 관점에 휘둘리지 않고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면 궁극적으로 갈등의 원인을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지혜로운 이가 미움을 대하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주의 깊게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과 남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다.”

수행의 배터리

자동차가 잘 달리려면 평소에 고장이 없는지 확인하고 꾸준히 주행하여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해야 하듯, 수행에도 배터리 충전이 필요하다.
수행을 해야 수행할 수 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평소에 꾸준하게 예불하고 기도해놓아야만 인생의 배터리가 방전됐을 때 자연스럽게 부처님에게 기대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 하기 싫어도 하고 바빠도 하고 습관적으로 그냥 하는 예불과 수행. 이것만이 우리를 부처님처럼 가는 길 위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