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코로나19 교회 집단 감염 사건으로 보는 광신과 본능.
2020년 여름, 교회에서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가 일어나 경각심을 일으켰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맹신’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인간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군집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놀거리가 있고 즐거움이 있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군집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강한 믿음의 대상으로 발전하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구와 본능을 다스릴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보면 불필요한 번뇌가 생기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고 말씀하셨다. 자비심으로 본능을 다스릴 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처님이라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복으로 산다”고 말씀하실 것 같다. 선업의 과보로써 받는 복과 덕으로 인생을 살아가자. 올바른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오계(五戒) : 불망어(不妄語)

아함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을 통, 해 이해하는 오계, 불망어.
“라훌라야,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의 출가수행이란 이와 같이 조금 남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과,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특히 부끄러워하지 않는 출가수행자를 경책했다.
출가수행자는 언제나 철저하게 계를 지켜야 하며, 불망어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재가자의 경우에는 엄격하게 불망어계를 지키기 어려운 현실이므로, 최소한 법회날이나 포살일만이라도 제대로 계를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하다.

오계(五戒) : 불투도(不偸盜)

오계의 두 번째 항목, ‘불투도不偸盜’를 이해할 때 단순히 도둑질 하지 말라는 수준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주지 않은 남의 것을 가지지 말라는 말에는 ‘남의 것’과 ‘내 것’이라는 분별이 전제되는데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저 생각에 불과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기적인 관계에 있으므로 어떤 한 가지 것에도 모든 사람의 행위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단순히 남의 것이기에 탐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것에 기울인 노력이 얼마만큼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기울인 타인의 공을 부정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
불투도를 성숙하게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진다. 무주상부시는 연기의 도리를 아는 사람의 행동이다.

오계(五戒) 불살생(不殺生) 2  

오계 중 첫 번째 계율인 ‘불살생’과 관련한 여러 사례와 생각할 거리.
불교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에 대하여 죽음을 부추기거나 말로써 찬양하는 경우, 선동하는 경우는 불살생 계율에 준하여 엄격하게 금기한다.
그러나 중한 병에 걸려 자신과 주변인 모두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는 경우, 그리고 깊은 삼매에 들어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그대로 열반에 이르는 경우에는 그것을 굳이 막지 않아도 된다.
불자의 육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면에서 순수한 고기를 섭취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살생됨을 보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듣지 않고, 그러했으리라고 의심할만한 정황이 전혀 없는 경우다. 수행자도 공양물을 선호의 대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적 견지에서 생활하되, 근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오계(五戒) 불살생(不殺生) 1

오계 중 첫 번째인 불살생으로 우리 시대의 살인을 고찰하다.
살생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고 특별히 살인(殺人)이라 말한다. 살인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문명, 문화권에서 금지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살인이나 전쟁 중의 살인, 자발적 안락사와 같이 판단을 고민하게 하는 상황에서도 일어난다.
어떠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불교에서는 동기와 의도에 의해 판단한다. 동기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의도는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이다.
동기가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도에 따라 업을 쌓으며 업의 과보를 받는다.

선과 악

영화 ‘사바하’로 생각하는 선과 악.

기독교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을 상정하고, 죄를 씻기 위한 첫 계명으로 순종을 말한다. 우리 일반 사회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사회적 판단에 의해 동일한 행위가 선이 되기도, 악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선과 악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죄에는 자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공하다. 다만 탐진치에 사로잡힌 행이 악이요, 무명을 벗어나 자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선에 다름 아니다.